- 국역/표점
- 국역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4
- 잡저(雜著)
- 또(又)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4 / 잡저(雜著)
또
내가 선사를 위해 무함을 변론하는 일로 오진영의 혈수(血讐)가 되자, 오진영은 자신의 문도(門徒)인 강태걸로 하여금 고소를 일으키게 하였다. 올해 여름과 가을 사이에 이미 전주(全州) 검사국(檢査局)에 세 차례 불려가 문답(問答)을 하였다. 원통하고 분하며 부끄럽고 미운 마음을 어찌 이루다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나의 일은 의(義)이고, 죄가 아니며, 당시의 법도 또한 이른바 '법'이다. 거의 끝났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생각지 않게 오진영의 칼날은 더욱 날카로웠고 당시의 법은 측량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11월 27일에 또 검사의 호출이 있자 반드시 일이 있게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같은 기한에 호출을 당한 사람은 족숙(族叔) 창(鬯)ㆍ함(涵) 두 어른과 족제(族弟) 사의(士毅)ㆍ 소상(蘇庠) 어른과 금재(欽齋) 형제였다. 기한이 되었을 때에 금재의 동생인 경집(敬執)【병철(秉哲)】과 사의만이 먼저 갔다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검사가 말하기를, '만약 강태걸과 원만하게 화해하지 않으면 반드시 법을 사용할 것이다.'라고 하며 물러가서 협의하게 하였습니다. 이른바 '원만하게 화해하라.'는 것은 통문을 고쳐 짓는 것과 '절대로 사서 읽지 말라[切勿購讀]'라는 네 글자를 취소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이와 같다면 이른바 '무함을 변론하고 유훈을 지킨다.'는 것이 도리어 유훈을 저버리고 무함을 사실로 만드는 것이 되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이에 한 통의 작은 글을 지어서 어려움을 함께한 여러 공들에게 돌려가며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들으니 검사가 즉시 강태걸과 화해하지 않으면 반드시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들이 죽음을 바칠 때입니다. 죽음을 바치면 선사가 있게 될 것이고 화해를 허락하면 선사가 없게 될 것입니다. 선사가 있는 것과 선사가 없는 것 사이에서 사람과 짐승으로 나뉘게 되었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12월 4일부터 때때로 현재 본군(本郡) 덕천면(德川面)주 52)에 있는 만종서재(萬宗書齋)주 53)에 머물렀는데, 10일 닭이 처음 울 때쯤에 이르러서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내가 한창 학도(學徒) 20여 인과 함께 깊이 잠을 자고 있다가 놀라 깨고서 일어나 묻기를 "이런 칠흑 같은 밤에 뭐하는 사람인데 방문하셨소?"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평면(梨坪面)주 54) 주재소(駐在所)의 일본과 한국 순사(巡査)이다. 전주(全州)의 검사국(檢事局)에서 잡아들이라는 통지(通知)가 있었기 때문에 왔다." 하였다. 나는 이것이 오진영과 강태걸이 만든 재앙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검사의 명령이 이처럼 화급(火急)하니, 지금 가면 반드시 큰 치욕을 당할 것이고, 이 치욕을 내가 맹세코 받지 않으려면 단지 죽음만이 있을 것이다. 선사를 위해 죽는다면 죽는다 한들 다시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다만 한스럽게 여기는 것은 세상의 도가 망극할 뿐이다. 이에 내가 순사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어둡고 눈이 쌓여서 피차가 모두 길을 떠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하늘이 밝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소?"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좋겠지만 검사가 오전까지 도달하도록 명령했다. 이를 어기면 나를 단죄할 것이니, 부디 양해하여 늦추지 말라."하였다.
내가 또 이미 그들과 일행이 되었는데 어찌 굳이 너희들에게 죄를 짓게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침내 길에 올랐다. 길을 나서 영달현(永達峴)을 지나 포자동(匏子洞)에 이르자 순사에게 말하기를 "선대의 묘가 여기 가까운 곳에 있으니, 내가 성묘하고 오겠소." 하니, 순사가 허락하고 공손히 묘 옆에 선 채 서로 지점을 가리켜며 말을 나누었다. 내가 그제서야 8대조비(代祖妣)ㆍ6대조고(代祖考) 및 조고비(祖考妣)의 묘에 나아가 절을 올리고, 끝으로 선고비(先考妣)의 묘에 이르러선 절을 마치자마자 나도 모르게 목이 메도록 통곡하였다. 선인(先人)께서는 불초한 나를 가르치다 학업을 마치는 것도 보지 못하셨고, 불초한 나는 학문을 이루기도 전에 먼저 선사의 일을 위해 죽을 것을 생각하니, 두산(斗山)주 55)은 얼굴을 찡그리고 달천(達川)은 흐느껴 울고자 하는 듯하였다.
성묘를 마치고서 또 앞서 걸어갔다. 길은 험하고 날은 컴컴했으며, 눈에 발이 빠지고 바람에 귀가 떨어져 나갈 듯하였다. 열 번 구르고 아홉 번 넘어지면서 천신만고 끝에 이평면(梨坪面) 주재소(駐在所)에 도착하니 동녘은 아직도 밝지 않았다.
주재소의 방이 쇠처럼 차가워 길을 따라왔던 최민렬(崔敏烈) 이하 20인과 둘째 아이 형태(炯泰)가 모두 추위에 벌벌 떨며 소름이 일자 순사가 사람을 시켜 온돌에 숯을 태우게 했다. 나는 그제서야 붓과 벼루를 가져오게 하여 옷의 띠에다 "오늘의 일은 단지 무함을 변론하고 유훈을 지켜서 지하로 돌아가 선사를 뵙는 것만이 있을 뿐, 다른 것은 말할 것이 없다."라고 크게 써서 검사에게 답할 말을 준비했다. 또 글을 써서 세 아우와 세 아들에게 분부하고, 또 나를 따라 배운 제자들과 희숙(希淑)ㆍ자유(子由)에게도 글을 써서 고하였다. 대체로 자신의 분수에 따라 반드시 죽을 뿐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날이 이내 밝아졌다. 여호(汝昊)ㆍ여직(汝直)ㆍ형복(炯復) 및 재종숙(再從叔) 치현(致賢)ㆍ삼종형(三從兄) 경빈(京賓)ㆍ조자정(趙子貞) 아우가 와서 보았다.
순사가 또 길을 재촉하기에 앞장서 나아갔다. 신태인역(新泰仁驛)에 이르러 전송하던 가족들은 돌려보내고, 최민렬(崔敏烈)ㆍ김상락(金常洛)ㆍ김용락(金庸洛)ㆍ나인상(羅仁相)ㆍ최정주(崔丁柱)ㆍ이병기(李炳基) 및 자정ㆍ형복만이 나를 따라 기차를 탔다. 한낮이 지나서야 전주(全州)에 도착했다. 검사국에 들어가니 검사가 말하기를 "만약 강태걸과 더불어 양조(兩造 원고와 피고)가 서로 화해하여 원만하게 해결한다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법률대로 할 것이다." 하였다. 나는 화해의 말에 대해서는 마치 듣지 못한 척 하고서 단지 말하기를 "이른바 '법률'이란 것이 무슨 법률이오?" 하니, 검사가 말하기를 "영업을 방해한 데 따른 법률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간재 선생께서 유서로 인허를 금한 것이 의리이다. 비록 친한 문인 자손(子孫)이라 하더라도 의리를 파괴하고 문고를 간행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강태걸이 문인의 문인으로서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여 유훈을 어기고 문고를 간행함으로써 간재 선생의 의리를 파괴하는 것이 어찌 온당한 일이겠는가. 선생께서 인허를 금지하면서 의리를 지키신 문고는 원래 강태걸이 이익을 꾀하는 영업의 물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문고가 영업의 물건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상, 방해의 유무(有無)를 묻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이 법률을 침범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니, 검사가 말하기를 "피고의 생각은 그럴 듯하지만, 법률가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말을 만들어 선사를 무함하고 유훈을 어겨 문고를 간행한 자는 오진영이다. 이 때문에 통문을 보내 오진영을 성토한 것이다. 오진영이 선사의 명예를 손상시킨 사람이니, 명예를 손상시킨 데 따른 법률은 오진영이 해당될 것이다." 하니, 검사가 말하기를 "도덕상으로 말하면 선사의 유훈을 지키는 것을 어느 누가 훌륭하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법률상으로 말하면 법률을 침범한 것이 된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천하에 어찌 도덕과 어긋나는 법률이 있겠는가." 하니, 검사가 말하기를 "작용하는 곳에는 다름이 있다." 하고서 마지막으로 검사가 말하기를 "만약 화해하지 않는다면 필연코 법률대로 할 것이다. 피고의 생각이 어떠한지 하나를 말하라. 피고는 통문을 지어 주모한 사람이기 때문에 특별히 불러 물은 것이다. 오늘이 바로 법률로 판결하는 날이니, 두 가지 사이에서 빨리 하나를 말하라." 하자, 내가 얼굴빛을 바로하고 천천히 말하기를 "나는 단지 무함을 변론하고 유훈을 지키는 것만을 알 뿐이다." 하고서 옷의 띠에 써 놓았던 것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이것을 보라." 하고 그것을 한 번 읽으니, 검사와 서기(書記)가 서로 돌아보며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조서를 받고, 다음에는 종이와 붓을 늘어놓았으나 끝까지 한 마디 말도 기록하지 않자 나가게 하였다. 오늘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은 실로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어쩌면 더 큰 치욕을 주려고 우선 느슨하게 하는 것인가?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 여안(汝安)이 허둥대며 넘어질 듯이 달려와 도착한 것을 보니, 그가 애를 태웠음을 알 수 있었다. 또 송기창(宋基滄) 아이가 뒤따라 도착하여 나를 놀라게 하고 감동시켰다. 이 아이는 올 해 나이가 15세인데 어제 가벼운 병세가 있어 밤에 서재에 오지 못했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 일을 듣고는 밥상을 대하고서도 먹지 않은 채 목이 메도록 통곡을 하며 말하기를 "우리 스승의 지조(志操)는 내가 이미 내심 알고 있다. 오늘 행차에 만약 치욕을 당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필연코 목숨을 버리실 것이니, 우리 스승께서는 아마도 이미 저세상으로 떠나셨을 것이다." 하였다. 결국에는 소매가 넓은 옷과 진흙 묻은 신발을 신고서 홀로 길에 오르며 말하기를 "나는 우리 스승과 진퇴를 함께할 것이다." 하고서는 험난한 백 리 길을 걸어 칠흑 같은 밤에 이곳에 도착했다. 병든 몸을 이끌고 추위를 무릅써가며 두 끼니를 먹지도 못한 채 슬픔과 근심으로 수척해진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모두 떠들썩하게 찬탄하면서 말하기를 "기이하구나. 이 아이는 나이가 어린데도 스승을 존경하는 정성이 어쩌면 그렇게도 도타운 것인가." 하면서 아울러 나에게 축하하며 말하기를 "어떤 가르침을 폈기에 이렇듯 감동해서 따르게 하였습니까?" 하니, 이에 대해선 부끄럽기만 하다.
11일. 따라 왔던 제군 및 자정ㆍ형복이 모두 떠났다. 나는 어제 풍한(風寒)이 빌미가 되어 거의 떨쳐 일어나 움직이기 어려웠다. 이로 인해 민열ㆍ기창과 함께 여관에서 몸을 조리하였다. 친족 사람 명익(明益)ㆍ문경(文卿)ㆍ명중(明中)ㆍ김군 백온(金君伯溫)이 모두 앞뒤로 보러 왔는데, 대체로 내가 구속과 치욕을 당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12일. 내가 집으로 돌아왔다. 정암(貞庵)ㆍ함재(涵齋)ㆍ견암(堅庵)ㆍ나재(懶齋)ㆍ신헌(愼軒) 및 상제 최여중(崔汝重)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보았다. 희숙(希淑) 및 임정노(林貞老)도 또한 완주에 도착해서 나를 위로하려고 했는데, 서로 길이 어긋나 보지 못했다. 【추후에 들으니 검사가 사람들에게 내가 옷 띠에 쓴 일을 이야기하면서 "도는 본래 광대한데, 김모는 이처럼 좁으니, 내가 어찌할 수 없었다."하였다고 한다.】
아, 고금 천하에 어찌 오늘날의 문고와 같은 일이 있단 말인가. 옛날 사림의 화는 이단의 부류에 있었는데 오늘날 사림의 화는 동문에 있다. 옛날 사림의 화는 자기 나라에 있었는데 오늘날 사람의 화는 외국의 힘을 빌려 일어난다. 옛날 사람의 화는 단지 도거(刀鋸)로 몸을 상하게 하거나 귀양 보내는 형벌이 있었는데 오늘날 사림의 화는 머리를 깎거나 몸을 노역하는 형벌이 있다. 옛날 사림의 화는 그래도 말할 수 있었는데 오늘날 사람의 화는 말할 수 없다. 옛날에 의리를 취함은 그래도 쉬웠는데 오늘날에 의리를 취함은 더욱 어렵다.
아, 무함을 변론하고 유훈을 지키는 것은 본래 제자의 직분인데, 공교롭게도 이렇듯 매우 험악한 오진영ㆍ강태걸과 원수인 오랑캐가 권력을 잡은 때를 만나 온갖 모욕과 분노, 억울함을 실컷 받았으니, 무슨 사람의 일이 이렇단 말인가. 비록 그렇지만 오히려 권면할 만한 일이 두 가지가 있으니, 위로는 선사를 저버리지도 않았고, 아래로는 내 몸을 잃지도 않았다. "화해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과 "머리가 깎이는 치욕을 받지 않았다."는 것,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라도 혹 잃었다면 짐승이요,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니, 어찌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나는 몽매한 선비의 스승에 지나지 않는데, 송기창은 일개 아이임에도 오히려 나의 마음을 알아주었다. 간옹은 도학의 종장(宗匠)인데, 오진영은 학문에 노숙한 사람인데도 꺼리지 않고 간옹을 무함하고 배반하였다. 아, 사람의 선악이 이처럼 서로 동떨어질 수 있단 말인가?
- 주석 52)덕천면(德川面)
- 현 전라북도 정읍시 중서부에 있는 면이다.
- 주석 53)만종서재(萬宗書齋)
- 현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우덕리에 위치해 있다.
- 주석 54)이평면(梨坪面)
- 현 전라북도 정읍시 서북부에 있는 면이다.
- 주석 55)두산(斗山)
-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덕천면·소성면에 걸쳐 있는 두승산(斗升山)을 가리킨다.
又
余以爲師辨誣事, 爲吳震泳血讐. 使其門徒姜泰杰, 擧行告訴. 今年夏秋間, 已被全州檢査局三呼問答, 痛憤羞惡, 何可勝言? 雖然, 吾之事, 義也, 非罪也. 時之律, 亦所謂'法'也. 意謂汔可已矣. 不料震鋒益銛, 時律叵測. 乃於十一月二十七日, 又有檢呼, 可知其必有事在. 同期被呼者, 族叔鬯涵兩丈及族弟士毅蘇庠丈及欽齋兄弟. 及期惟欽齋弟敬執【秉哲】與士毅先往而還曰: "檢曰: '若不與姜泰杰圓滿和解, 必有律.' 使之退去協議. 所謂'圓滿和解'者, 改作通文及取消'切勿購讀'四字云." 余聞之, 曰: "如此則所謂'辨誣守訓'者反爲背訓實誣, 寧死, 不可許也." 乃作一小文, 輪告同難諸公曰: "聞檢言不卽和杰, 必有事在. 此正吾人致死之秋也. 致死有師, 許和無師, 有師無師之間, 人獸判矣, 可不畏哉?" 乃十二月初四日也, 而時見住本郡德川面萬宗書齋. 至初十日鷄初鳴, 有二人訪余. 余方與學徒二十餘人幷熟寢, 驚寤起問曰: "如此黑夜, 何人來訪?" 彼曰: "吾等梨坪面駐在所日韓巡査, 自全州檢事局有拿引通知, 故來." 余思此震杰之禍也. 檢令火急若此, 今行必遭大辱. 此辱我誓不受, 則只得有死而已. 爲師而死, 死復何恨? 但所恨者, 世道之罔極也. 乃謂巡査曰: "天黑雪積, 彼此俱不堪行, 待天明如何?" 彼曰: "此固好矣. 但檢令午前到達, 違此罪我, 幸見諒勿緩." 余又思旣爲一行, 何必爲若屬罪也? 遂登道. 行過永達峴, 至匏子洞, 謂巡査曰: "先墓在此近, 吾拜省而來." 巡査許之. 拱立墓傍, 相與指點有言. 余乃進拜八代祖妣六代祖考及祖考妣, 終至先考妣墓, 則拜訖而不覺痛哭失聲, 念先人之敎育不肖而未見卒業, 不肖之學未及成而先死師事, 斗山爲嚬, 達川欲咽. 省畢又前行, 路險天黑, 雪沒足, 風割耳, 十顚九倒, 千辛萬苦, 到棃駐, 東方未明. 駐房如鉄, 從行崔敏烈以下二十人及次兒炯泰, 皆寒戰生粟. 巡査使人溫突熾炭. 余乃令進筆硯, 大書衣帶曰: "今日之事, 只有辨誣守訓, 歸拜先師於地下而己, 他無可言者", 以備答檢之辭, 又作書分付三弟三子, 又書告從學諸子及希淑子由. 蓋以自分其必死也已. 而天乃曙. 汝昊汝直炯復及再從叔致賢三從兄京賓趙弟子貞來見. 巡査又促行前進, 至新泰仁驛, 送家族歸之. 惟崔敏烈金常洛金庸洛羅仁相崔丁柱李炳基及子貞炯復隨余上車. 日過午, 到全州. 入檢事局. 檢曰: "若與姜泰杰兩造相和, 圓滿解決則已, 不然有律." 余於和解之說, 若不聞也者, 但曰: "所謂'律'者, 何律也?" 檢曰: "營業妨害律也." 余曰: "艮齋先生之遺書禁認義也. 雖親門人子孫, 不可壞義而刊稿. 況姜泰杰以門人之門人, 爲自己之牟利, 違訓刊稿, 而破艮齋先生之義, 何所當乎? 先生禁認守義之稿, 元不當爲姜泰杰牟利之營業物也. 稿旣不當爲營業物, 則妨害有無, 不當問也. 故吾則不知其爲律也." 檢曰: "被告思想則似然矣, 法律家思想則不然也." 余曰: "造言誣師, 違訓刊稿者, 吳震泳也. 所以發通討吳也. 吳是損害先師名譽者也, 損害名譽之律, 吳可以當之也." 檢曰: "以道德上言, 則守師訓, 孰不曰'不善'? 以法律上言, 則爲犯律." 余曰: "天下安有乖道德之法律乎?" 檢曰: "用處則有異也." 最後檢曰: "若不和解, 必然有律. 被告之意如何, 請一言之. 被告是製通而主謀者. 故特呼問之. 今日乃法律判決之日, 二者之間, 斯速一言." 余乃正色徐言曰: "吾則但知辨誣守訓而已." 以衣帶所書者示之曰: "欲知我意, 請視此也." 爲之一讀, 檢與書記相顧無言. 初以受調, 次設紙筆, 終不錄一言, 使之出去. 蓋今日之無事, 實意慮不到也. 豈以將加大辱, 故姑緩之歟? 夕飯後, 汝安倉皇顚倒而到. 其焦心可想. 又宋童基滄隨到, 令人驚感. 此童今年十五昨有微恙, 夜不到齋, 至朝始聞吾事, 對案不食, 失聲痛哭曰: "吾師志操, 吾已竊覸矣. 今行若不免遭辱, 必然舍生. 吾師殆已逝矣." 遂以廣袖泥鞋, 隻行登道曰: "吾當與吾師同進退." 間關百里, 黑夜抵此. 其扶病觸寒, 二頓不食, 悲憂瘦瘠之狀, 人皆嘖嘖嘆賞曰: "異哉. 此子幼齡, 尊師之誠, 何其篤也?" 幷賀於余曰: "行何敎術而致此感服?" 是則可愧也. 十一日. 從行諸君及子貞炯復皆去. 余爲昨日風寒所祟, 殆難振作, 因與敏烈基滄調理于旅館. 族人明益文卿明中金君伯溫皆先後來見, 蓋意我之遭拘辱也. 十二日, 余歸家. 貞庵涵齋堅庵懶齋愼軒及崔哀汝重來待見余. 希淑及林貞老, 亦到完慰我, 而交違未見. 【追聞檢向人道余帶書事曰"道本廣大, 金某如此狹隘, 吾無如何"云】 嗚呼! 古今天下, 寗有今日之稿耶? 古之士禍在異類, 今之士禍在同門, 古之士禍在本國, 今之士禍借外國, 古之士禍, 只有刀鋸竄謫, 今之士禍, 乃有髠首役身, 古之士禍, 猶可說也, 今之士禍, 不可說也, 古之取義, 尙可易也, 今之取義, 更可難也. 噫, 辨誣守訓, 固弟子職分, 巧爲逢此至險之震杰讐夷之執命, 飽受萬端侮辱憤忿抑鬱, 此何人事? 雖然, 尙有二事可勉, 上不負先師, 下不失吾身, 曰"不許和解"也, "不受髠辱"也, 于此二者, 一或失焉, 獸而非人, 可不念哉? ○吾不過蒙士師也. 宋基滄一童行也, 尙能知吾之心. 艮翁乃道學宗匠. 震泳老於學者, 而不憚誣倍艮翁. 噫, 人生善惡相懸, 乃如此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