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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3
  • 잡저(雜著)
  • 쌍백당 이 충숙공이 지은 매죽당 부군의 묘갈명을 읽고 【1942년】(讀雙柏堂李忠肅公所撰梅竹堂府君墓碣銘 【壬午】)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3 / 잡저(雜著)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13.0001.TXT.0038
쌍백당 이 충숙공주 337)이 지은 매죽당주 338) 부군의 묘갈명을 읽고 【1942년】
삼가 생각건대 정릉(靖陵 중종)의 시대에 정암(靜菴) 조 선생(趙先生 [조광조(趙光祖)])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현인(賢人)들이 무리지어 나와 지치(至治 지극한 정치)를 일으킬 것을 기대하였다. 당시에 노천(老泉) 김공(金公 김식(金湜)) 같은 사람이 실로 정암과 덕과 공이 같았는데, 부군(府君)이 그들에게 천거를 받았으니, 함께 무리지어 나간 현인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 분명하다. 화(禍)가 일어나자 김공이 또 제일 먼저 정암과 함께 걸렸는데, 부군은 애초에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암, 노천과 함께 화를 입지 않았으니, 이에 기미를 보고 편안히 물러난 한 가지 일이 도리어 혹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부군은 처음부터 한결같이 은자(隱者)였으니, 가첩(家牒)에서 '기묘사화(己卯士禍) 뒤에 은거하여 자폐(自廢)했다.'라고 기록한 것은, 이때부터 속세의 생각을 영원히 끊고 아울러 교유(交遊)를 그만둔 것으로써 말한 것이다. 묘갈명(墓碣銘) 서(序)에서 김공이 천거한 것만 말하고 기묘사화를 말하지 않았는데, 이는 초연히 홀로 면했다는 뜻을 드러내려고 한 것임을 말할 필요가 없으니, 보는 사람이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주석 337)쌍백당 이 충숙공
이세화(李世華, 1630~1701)이다. 쌍백당(雙柏堂)은 그의 호이다. 충숙(忠肅)은 시호이고 자는 군실(君實)이다.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후창집(後滄集)》 권12 〈분재 문중에 보냄[與粉齋門中]〉에서 후창은 "매죽당공의 묘갈은 외손인 명현 쌍백당의 손에서 나왔다."라고 말하였다.
주석 338)매죽당
김종(金宗, 1471~1538)이다. 매죽당은 그의 호이고 자는 사앙(士仰), 본관은 부안(扶安)이다.
讀雙柏堂李忠肅公所撰梅竹堂府君墓碣銘 【壬午】
竊惟靖陵之世, 靜菴趙先生之當朝也, 群賢彙征, 期興至治. 時則有若老泉金公, 實與靜菴同德同功, 而府君爲其所薦, 則其爲可與同一彙征之賢審矣. 及其禍作, 金公又首與靜菴同嬰, 而府君初不出仕. 故不與靜泉同禍, 于以見見機恬退一著, 反或優焉. 蓋府君從初一隱者, 家牒所記己卯士禍後, 隱居自廢者, 以其從此永斷世念, 幷息交遊而言也. 銘序只言金公薦, 而不言己卯者, 所以著超然獨免之意, 不待於言也, 覽者詳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