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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2
- 서(書)
- 계제 여안에게 보냄 을축년(1925)(與季弟汝安 乙丑)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2 / 서(書)
계제 여안에게 보냄 을축년(1925)
몇 해 전, 청도(淸道)에 갔다가 곧바로 돌아왔는데 성순재(成舜在)주 64)가 여러 사람들 가운데 나에게 말하기를 "임자년(1912) 간에 화도(華島 계화도)로 들어가 선사(先師)의 유고를 선사(繕寫 잘못을 바로잡아 다시 베껴 쓰는 것)할 때 노형께서 상중에 행상(行商)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선사께서 선존장(先尊丈 돌아가신 남의 부친)에게 보낸 편지 속에 '아드님은 성인이 되기를 스스로 기약합니다.[聖人自期]'라는 한 구절이 너무 지나치므로 선사께 말씀드려 삭제하였는데 지금까지 편치 않습니다."라고 하더구나.
내가 말하길 "유고 작업을 할 때 단지 노형이 내가 장사를 했다고 여겨 그 글을 삭제했다고 들었는데, 저는 속으로 '공상(工商)은 사민(四民)의 직분에 속하는 것이니 만약 그 집이 가난하면 장사를 한들 학문에 무슨 문제가 될까.'싶었습니다. 다만 나는 그런대로 살 만하여 이런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근년 이래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기르는 일이 번다하고, 집안일에 몰두하느라 규범을 지키는 것이 독실하지 못하여, 이 구절이 참으로 과당(過當)하였으므로 노형과 이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비로소 들어보니 또한 한층 더하여 지목한 것은 노형이 그 때부터 지금까지 저를 상중에 행상이나 한 사람으로 알고 있어서 입니다."라고 하였다.
성순재가 말하길 "그 당시 노형의 종족들께 들은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제 보니 천하의 말이란 믿을 만한 데에서 들어도 온통 다 믿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고는 인하여 말하기를 "흠재(欽齋)주 65)가 이 면의 면장 말을 들어보니, '성기운(成璣運)이 관아의 형벌을 받고나서 분명히 민적(民籍)에 가입했다.'고 하였답니다. 면장의 말을 누가 믿지 않겠습니까마는 다만 나는 참으로 입적(入籍)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저들이 사사로이 이름을 넣은 것은 내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더구나.
대개 성순재의 이 말은 의도가 나의 일로 인해 자기 일을 해명하는 데 있다. 그가 "상중의 장사" 얘기를 운운한 것은 그 당시 실지로 들은 바가 있다. 그러나 갑자기 이를 들추어내어 입적(入籍)의 변명거리로 들이댄 까닭은 다 알 수 없지만 "그 소문을 믿지 못하겠다."고 운운한 얘기는 분명하다.
내가 그러므로 다만 권순명(權純名)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그대는 나와 가까이 살고 있으니 내가 상중에 행상을 한 것을 그대는 알고 있는가?"라고 하니, 권순명이 말하길 "나는 모릅니다."고 하였다. 내가 말하길 "행상은 자기 집안 일이 아닌데, 천하에 어찌 이웃 마을에서 모르는 행상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더 이상 소문의 출처를 캐묻지 않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남진영(南軫永), 유영선(柳永善)과 동행하면서 내친김에 일러 말하기를 "내가 신해년(1911) 봄 상(喪)을 마치고, 그해 겨울 어떤 사람에게 빌려간 돈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돈이 순창(淳昌)에 있다.'고 하여, 마침내 가서 받아내고 도중에 불의의 사고를 대비하여 베로 바꾸어 돌아와 돈을 만들어 썼습니다. 단지 이 한 가지 일이 매매에 관계되지만, 그러나 그것을 '장사'라고 하는 건 사실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를 상중에 전가시키는 것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하고는 한 번 웃고 말았다.
저 운한(雲翰)과 제철(濟喆) 무리는 불고 씻는 데주 66) 열을 올리다가 허물을 발견하지 못하자 이에 성순재가 남을 끌어들여 자기를 변명한 얘기로써 뒤집어 면박하니 거상(居喪)이 무례하다는 사안이 갈수록 더욱 험해졌다. 성순재는 내가 임시로 재물을 맡은 것에 화가 났으나, 경묵(京默)에게 깨져 필시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쓸데없이 지필(紙筆)을 허비하여 성순재를 힐난하지 말거라. 아, 스승에 대한 모함도 아직 변론하여 밝히지 못하였거늘 자신과 관계된 일을 어찌 족히 변명을 하겠느냐. 다만 네가 꼭 알아야둬야 할 것이 있어 한 마디 하였다.
- 주석 64)성순재(成舜在)
- 성기운(成璣運, 1876~1956)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순재(舜在), 호가 덕천(悳泉)이다.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문인으로 1917년 5월 24일 호적령(戶籍令)에 반대하여 호적을 거부하였다. 경상북도 청도 출신이다.
- 주석 65)흠재(欽齋)
- 최병심(崔秉心, 1874~1957)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존(敬存), 호는 흠재(欽齋)이다. 이병우(李炳宇)·전우(田愚)의 문인이다.
- 주석 66)불고 씻는 데
- 원문의 '취세(吹洗)'는 털을 불어 흠을 찾고 때를 씻어 흉터를 잡아내는 것으로, 숨겨진 남의 잘못을 상세히 들추어내는 것이다.
與季弟汝安 乙丑
年前往淸道旋歸, 成舜在於衆中謂余曰:"壬子年間, 入華島, 繕寫師稿時, 聞'老兄喪中行商'之說.而先師與先尊丈書中, '令胤以聖人自期'一句, 語太過.故告先師而刪之, 至今未安."余曰:"稿役時, 但聞'老兄以吾爲商業 故刪其書', 而吾心以爲'工商參爲四民之職, 苟其家貧商業, 何害學問.' 但吾則且得捱過, 不至此境, 而因年來事育務煩, 埋頭幹蠱, 守規未篤, 此句實爲過當.故不與老兄辨理.今始聞之, 則又加一層指目, 是老兄自那時至于今, 認我爲喪中行商者也."成曰:"那時聞於老兄宗族間者, 如此矣.以今觀之, 天下之言, 不可以其聞於可信處, 而一切信之也." 因言 "欽齋聞此面面長之言, 則以爲成璣運當官刑後, 分明入民籍云.面長言孰不信之.但我實不許入籍, 則彼輩私自入名, 吾不可得以知之矣."蓋成之此言, 意在於因我之事以發明己事也.其云"喪商"之說, 那時實有所聞.抑臨時撰出, 對擧入籍之資, 皆未可知, "其不信所聞"云云之說.則昭然矣.余故但顧謂權純名曰:"君居我近, 吾之喪中行商, 君其知乎?" 權曰:"吾不知也." 余曰:"行商非自家屋裏事, 而天下焉有隣村所不知之行商乎?", 不復盤問言根而歸.歸路與南軫永、柳永善同行, 語次謂之曰:"吾以辛亥春解喪, 是年冬, 請人借金.其人以謂'金在淳昌,' 遂往推尋.而備路中不虞, 貿布而歸, 作錢用之.只此一事, 亦涉買賣.然謂之爲商則非實矣.轉而移之喪中, 則又誤矣." 一笑而罷.彼雲翰、濟喆輩, 疲於吹洗, 而不得疵瘢, 則乃以成之因人明己之說, 飜作面駁, 居喪無禮之案, 可謂愈出愈險也.成則怒我假掌財僞京黙之撲破, 必不爲之一言也.汝毋庸徒費楮筆而詰於成也.噫, 師誣尙未辨白, 事關自身者, 何足置辨.但在汝有不可不知者, 爲一言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