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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2
- 서(書)
- 족질 상집 형돈에게 보냄 신사년(1941)(與族姪庠集 炯敦 辛巳)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2 / 서(書)
족질 상집 형돈에게 보냄 신사년(1941)
예전부터 서로 그리워하며 여러 해 동안 만나고 싶었던 게 단지 백대를 내려온 한 집안의 정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피차 같은 심정이라 많은 말이 필요 없겠지요. 다만 이번 일은 어찌 그리 서로 감응한 게 오묘하고 서로 어긋난 게 기이하단 말입니까. 천리 길을 한 번 가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닌데 번갈아 찾아가 끝내 만나지 못하였으니 마치 숨바꼭질 같습니다. 아마도 또 하늘이 우리 두 사람을 가지고 한 때의 희롱거리로 삼았나 봅니다. 참으로 서글프고 망연자실하여 이 심정을 어찌할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가 이미 함께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또 각각 멀리 방문하는 정성을 다하였으니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만나지 못한들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설령 서로 만나서 온종일 함께 있어도 칠 척의 몸과 네 치의 구이(口耳)주 24)는 남들과 같은 데 지나지 않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어도 새롭고 기이한 것은 없어 두 사람 마음이 함께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또 무슨 슬픔이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제가 당신 집으로 행차했을 때 당신 아들의 정성과 물색이 모두 극진하여 평소에 곧은 의리로 가르쳤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저희 집에 왔을 때는 집안 조카가 예로 대접한 게 없어서 가르침이 온전하지 못한 것이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듣건대 지난 여행에 계룡산과 금강산을 둘러보고 돌아간다 하셨는데 과연 하늘에 잇닿은 비로봉(毗盧峯) 정상에 올라 장가(長歌)를 부르며 애통해하고, 다시 망월대(望越臺)에서 상심하며 사육신의 충혼을 위로하며, 마의태자(麻衣太子)의 능에 성묘하고, 선조의 높은 절개를 사모하며, 표연히 금강(錦江)과 동해의 바람을 쐬며 가슴속에 많은 쾌활함을 느끼셨는지요?
제가 갔을 때도 선향(仙鄕) 삼동(三洞)주 25)의 승경을 두루 돌아보고 선현의 유적을 다 방문하여 가슴가득 우울한 기분을 삭이려 하였으나, 그대를 만나지 못해 전혀 감흥이 일지 않아 겨우 화림동(花林洞)만 보고 돌아왔습니다. 저 심진동(尋眞洞)과 원학동(猿鶴洞)주 26)에서 안문(雁門)의 불우함주 27)을 보상받을 수 있는 날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당신 집으로 다시 갈 수 있겠지요. 동쪽을 아련히 바라보며 읍에서 바람을 쐬고 있습니다.
- 주석 24)칠 척의……구이(口耳)
- 마음속에 깊이 체인(體認)하지 않고 그저 귀로 들은 것을 입으로 말하는 소인의 학문을 가리킨다. 《순자(荀子)》 〈권학편(勸學篇)〉의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와 입으로 나간다. 입과 귀의 사이는 네 치밖에 안 되니, 어떻게 칠 척의 몸을 아름답게 할 수 있겠는가.[小人之學也, 入乎耳, 出乎口.口耳之間則四寸耳, 曷足以美七尺之軀哉?]"라는 구절에서 연유하였다.
- 주석 25)삼동(三洞)
- 안의삼동(安義三洞) 즉 화림(花林), 원학(猿鶴), 심진(尋眞)을 이른다.
- 주석 26)원학동(猿鶴洞)
- 원문에는 "원학(園鶴)"으로 되어 있으나 오류다. 원 지명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 주석 27)안문(雁門)의 불우함
- 《한서(漢書)》 권70 〈단회종전(段會宗傳)〉에 의하면, 단회종은 대절(大節)을 좋아하고 공명(功名)을 자랑하는 인물로, 안문 태수(雁門太守)에서 면직되었다가 다시 서역(西域)의 도호(都護)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할 때에, 그와 친하게 지내던 곡영(谷永)이 그가 늙은 나이에 변방으로 나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증언(贈言)을 지어 이르기를 "그대는 옛 제도를 따르고, 특별한 공로를 세우려 들지 말라. 마치고 다시 속히 돌아오기만 해도 안문의 불우함을 보상(補償)하기에 충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여기서는 뒷날 더 좋은 만남을 기약하자는 것이다.
與族姪庠集 炯敦 辛巳
夙昔相慕, 積年願見, 非但以百世一室之誼, 彼此同情, 不須多言.惟是今番之事, 何其相感之妙, 而相戾之奇耶! 千里一行, 良非易事, 而互換踵門, 竟失識面, 有若迷藏者然.豈亦天公故將吾兩人作一時戱耶.悵焉惘焉, 不知爲懷.雖然, 吾輩旣有所同存之心, 又各盡遠訪之誠, 則斯亦足矣.不見何害? 使其相見而竟晷不離, 不過七尺之修四寸之具, 與人同者;達宵談討, 亦無新奇, 而不過兩心之所同存者爾.又何悵惘之有? 但念塵裝之於仙庄, 令子之情物俱摯, 可見義方之有素.而高躅之於弊齋, 家姪之禮數埋沒,甚慙敎導之全未也.竊聞曩行將歷覽鷄龍金剛而歸, 果能陟連天毘盧之頂, 放長歌之痛, 而復傷心於望越之臺, 弔六臣之忠魂, 拜省於麻衣之陵, 慕先祖之大節, 飄然溯錦江東海之風, 覺胸中多少快豁否? 鄙行亦欲徧觀仙鄕三洞之勝, 畢訪先賢之遺跡, 盡銷滿腔之鬱氣, 以未遇貴座, 殊沒意況, 僅見花林而歸.未知彼尋眞園주 1)鶴, 如得補鴈門之踦者有日.則那時可能重詣衡門也歟! 東望杳然臨風於邑.
- 주석 1)園
- 원문 "園"은 '猿'의 오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