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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0
  • 서(書)
  • 족제 희숙에게 답함 갑술년(1934)(答族弟希淑 甲戌)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0 / 서(書)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10.0001.TXT.0019
족제 희숙에게 답함 갑술년(1934)
편지를 보고 매우 기뻐한 것은 기꺼이 서로 강론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만 첫 번째 의제에서 말하기를 "정견(定見)은 구차하게 동일할 수 없고, 소집(素執 평소의 뜻)은 구차하게 추구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을 지금의 강명(講明)하는 일에 일컫는다면 나로 하여금 끝내 장차 소망이 없게 만들 것이다. '의아심을 갖고[藏其疑訝]'부터 아래로 '거절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有所難辭]'에 이르기까지의 한 대목의 말과 뜻은 완연히 삼연(三淵 김창흡)이 지은 〈의상중구서(擬上仲舅書)〉의 기미(氣味)이다. 진실로 그대의 정견과 소집이 이와 같으니, 차라리 우선 느슨하게 시일을 기다리는 것을 마치 새가 알을 품어 천천히 기혈을 감동시켜 들이는 것처럼 해서 중도(中道)의 오묘함을 성취하는 것이 십분 합당한 도리가 될 것이다. 내가 이러한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태양증(太陽證)이 발작하고 또 지의(遲疑)의 습관을 이루면 그대로 태타(怠惰)하고 위미(委靡)한 지경에 함몰되어서, 도리어 한 건의 큰 그릇된 일을 초래할까 두려워 이 때문에 끝내 다시 논하는 것이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을 성토할 때는 그 경중(輕重)과 완급(緩急)을 살펴야 한다.'는 말은 옳다. 오진영은 진실로 심복(心腹)의 질병이요 소장(䔥墻 : 내부)의 적이다. 김용승도 어찌 다르겠는가. 오진영은 '스승에게 인교(認敎)가 있었다.'고 말하였고 김용승 또한 '선생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였다. 오진영은 스승의 절의를 무함하여 깨트렸고, 김용승 또한 선사(先師)의 학술을 고문으로 배척하였다. 이 밖에 피차의 어지러운 일들을 거의 모두 거론하여 비교하긴 어려우나, 단지 한 가지 일이라도 경중을 따져 그 성토를 완급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김용승이 소장(䔥墻)에서 화를 일으킨 것도 오진영과 동일하거늘 어찌 사문(師門) 밖의 졸개라고 하는가. 그가 사문 밖에서 자립한 것은 화를 끼친 이후의 일이니 이는 사문 밖에 서서 화를 끊임없이 짓는 자이다. 오진영은 사문 내에 서서 화(禍)를 끊임없이 짓는 자이다. 비록 사문 내외(內外)라는 차이는 있지만 모두 소장(䔥墻)의 변란에 관계되어 화가 그치지 않는 점은 동일하다. 하물며 오진영의 인무(認誣)는 변론이 쉽지만, 김용승이 학술을 배척한 것은 밝히기가 어렵다. 비록 우리 아우처럼 밝은 자도 또한 '완급경중(緩急輕重)'이라는 말을 두어 속임 당함을 면치 못한 것을 더욱 볼 수가 있다. 김용승이 스승을 배반하고 모독하는 고문(告文)을 지은 것은 과연 진실로 자기의 유감을 풀려고 하는데서 나온즉, 그의 죄는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지은 것보다 심한 점이 있다. 단지 문도가 아니라고 자처했을 뿐만 아니라 선사의 학술을 배척함에 여지가 없었거늘, 우리 아우는 작은 질병으로 여기는 것은 어째서인가. '문밖의 졸개를 억지로 맞아 읍을 했다.'고 말했는데, (김용승의 잘못을) 변척(辨斥)한 것을 '읍을 해서 맞이했다.'고 한 것은 천하에 있지도 않고 고금에 처음 듣는 것이다. 이 일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다른 일은 오히려 무엇을 바라겠는가. 백세(百世)의 공론은 비록 세상에서 나오지만, 우리가 간여하지 않으면 그 공정함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우리에게 있는 것은 사사로움일 뿐이다. 한 사람의 사사로움이 점차 행해지면 백세의 공정도 장차 기댈 곳이 없으니, 이 때문에 옛날부터 '의(義)를 듣고 행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다.'주 23)라는 비판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아우의 신상에 이르러서 이미 '공(公)'자가 없으니, 오히려 어느 겨를에 백세(百世) 후에 김용승의 죄를 논할 것을 바라겠는가. 양묵(楊墨)의 말도 애초에는 또한 어지러운 사설(辭說)에 불과했으나 끝내 천하에 가득 찼다. 하물며 김용승이 설한 바는 또 한때의 어지러운 사설에 견줄 바가 아니다. 선사의 학술을 배척하여 다시 세상에 밝혀지지 않게 하였고 사문의 쇠잔한 명맥을 박상(剝喪)하였으니 '사람의 불인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는 전날 그대의 유시와 진실로 같다. 사문난적 오진영이 단지 자신만을 해치는 것과 비교해보면 서로 큰 차이가 난다. 우리 아우는 경중의 권도(權道)를 잃은 것이 분명하다. 혹자는 성토하고 혹자는 성토하지 않으니 어찌 모순이 아니겠는가. '오진영을 성토한 일을 김용승에게 시행하라고 한 것은 있고, 김용승을 용서하라는 것으로써 오진영에게도 은혜를 베풀라고 하면 옳지 않다.'고 하였는데, '두찬진진(杜撰陳瑧)주 24)'의 인용은 온당하지 않다. 정자(程子)가 위에 있으면서 따지지 않은 것은 제자가 아래에 있는데 더불어 변론함은 이것이 도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생전(生前)과 사후(死後)도 또한 저절로 분별이 있으니 변무(辨誣)를 가히 그칠 것인가? 예전에 만일 정자의 신후(身後)에 문인의 변론이 없었다면 정자가 지금처럼 정자로 추앙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맹자(孟子)가 양묵에 대한 변척에서 유독 불공대천의 원수와 같이 여겼다는 것은 있었지만 다른 것은 듣지 못했다. 어찌 그 충역(忠逆)과 부자(父子)의 분수로써 변척에 힘을 더하였으랴. 가령 김용승이 기극(忮克)하는 마음을 내서 선사를 생전에 흥분하여 매도했더라면 당시엔 절로 선사가 계셔서 높이는 듯하지만, 선사를 모독하는 고문이 금일에 있게 된 것은 마땅히 변명해야 한다. 우리 아우는 한유(韓愈)의 문장을 숙독한 사람이다. 한유의 글 중에 이르기를 "면면히 이어지다, 점차 약해져서 사라지게 되었거늘 이러한 때 그 사설(邪說)을 고무하여 틈을 타니, 오호라 그 불인(不仁)이 심하도다!"라고 하였다. 이미 불인하다고 하고 또 심하다고 하였으니, 즉 곧바로 위급한 지경에 있어서 오악(惡惡)의 정(情)이 또한 더욱 절실하였던 것이다. 우리 아우 또한 이러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거늘, 이제 '오악의 정이 또한 다시 절실한 것은 형세이지 의리가 아니다'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선사가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눈으로 부사(父師)가 무함(誣陷)(誣告)를 입은 것을 보고도 변명하고 성토할 줄 모르는 자는 칼로 갈라도 아픔을 모르는 자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매우 미워한다는 말씀이다. 일이 부사(父師)에 관계되면 매우 미워하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에 맞고, 다른 일 없이 미워하기를 심하게 하면 난(亂)을 일으키는 법이다. 인용한 한씨와 구씨, 진씨와 유씨의 일은 잘못이다. 저들은 의론으로 대대(對待)한 것이고 김용승은 침범하고 배척하여 윗사람을 범한 것이니 어찌 나란히 견주어 동일시하는가. 만일 구양수가 〈계사(繫辭)〉를 의심하여 아울러 공자까지 의심하고, 유씨가 《중용》 주(註)를 의심하면서 아울러 주자(朱子)까지 병통으로 여겨서, 한결같이 배척하기를 김용승이 선사에게 한 것처럼 했다면 한씨와 진씨가 어찌 성문(聖門)의 적이요 사문의 적이라고 성토하지 않고 아무 일 없이 그쳤겠는가. 우리 아우는 한・구・진・류가 소집(素執)을 구차히 같게 하지 않았고, 같지 않더라도 똑같이 현인이 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 김용승에 대한 일에 견주었다. 그리고 탄식하며 "그만이로구나! 다시는 이 사람을 볼 수 없다." 하는 것에 자신을 해당시켰다. 우리 아우는 진실로 현명하거니와 김용승 또한 진실로 현인이 되어, 다시 분붕(分崩)하고 괴란(壞亂)한 검극(劍戟 다툼)의 장이 없게 돼서 참극의 화를 면하게 되었으니 그대 쪽을 생각하고 바라보며 다만 흠모하고 찬탄하는 마음이 절실하다. 만약 김용승의 모독하는 고문이 선사에게 누가 되지 않는다면, 선사가 어찌 가평 김평묵의 전옹에 대한 제문을 배척하여 물리쳤겠는가. '독고(瀆告)'의 독(瀆)이라는 글자에서 누를 끼쳤다는 것을 저절로 볼 수 있다. 전서(前書)에서 이르기를 "수립(修立: 몸을 닦아 세움하고 이름을 드날려 천하 후세에 아무개의 말이 가히 믿을만하다는 것을 알게 할 뿐입니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비록 말이 많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이는 분명 마땅히 말을 적게 하고 많이 하지 말라는 것을 일컫는 것으로서 곧 우리가 수립(修立)한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전서로 보건대, 수립은 근본이고 변무(辨誣)는 지말(枝末)이라고 하였거늘 이제는 변무가 근본이고 수립이 지말이라고 하여 심지어는 "이렇게까지 나의 말을 살펴주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하기에 이르렀으니, 매우 부끄러워서 땀이 난다. 선사가 가평 김평묵의 〈제매산문(祭梅山文)〉을 보고서, 곧바로 변척하기를 시각을 지체하지 않고 여력을 남기지 않은 것이 어찌 일을 벌이기를 좋아해서 그랬겠는가. 또한 반드시 심히 부득이한 점이 그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군자는 대개 변척하지 않는 것을 옳다고 여기고, 이어서 변명까지 하니 그 또한 아마도 전배(前輩)보다 훨씬 우월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인가. 우리 아우도 이러한 곳으로 침침히 달려 들어가니 나의 마음에 안타깝게 여긴다. 내가 감히 한씨와 진씨가 구씨와 유씨에게 대처한 것과 동일하게 하지 못한 것은, 나의 경우가 단지 의론의 작은 일이 아니라 실로 사문의 도적을 방과하는 것에 관련 된 큰일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돌이켜 생각할 바탕이 될 수 있겠는가.
주석 23)의(義)를……것이다
《논어》 〈위정(爲政)〉에 "제사 지낼 만한 귀신이 아닌데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고,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非其鬼而祭之, 諂也. 見義不爲, 無勇也.〕"라고 한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주석 24)두찬진진(杜撰陳瑧)
뜻이 미상이다.
答族弟希淑 甲戌
見書甚喜, 以其肯相講論也.但初題謂定見不可以苟同, 素執不可以苟求, 此非不然, 謂之於今所講之事, 則使我殆將無望.藏其疑訝以下 至有所難辭一節, 語意宛然是三淵擬上仲舅書氣味.信乎其有定見素執也, 如此則無寧姑且緩之以待時日, 如鳥抱卵, 徐使氣血感入以成中字之妙, 是爲十分恰好道理.非不知此, 不免而我太陽證發, 又恐遲疑成習, 仍䧟怠惰委靡之科, 反得一件大差事來, 是以卒復論之.討賊審其輕重緩急之說當矣.吳固心腹之疾也, 䔥墻之賊也.金何異也? 吳言師有認敎, 金亦言先生可易.吳則誣破師義, 金易告斥學術.餘外彼此之紛紜, 殆難悉擧而比較, 只有一事容有輕重而緩急其討者乎.金之起於䔥墻, 亦與吳同也, 何以云門外卒乎? 若其自立於門外, 則貽禍以後事.是立於門外而作禍不已者也, 吳則立於門內而作禍不已者也.雖有門內外, 而俱係䔥墻之變, 禍之不已則同也.何況吳之認誣易辨 而金之斥學難明.雖明如吾弟者, 亦不免有緩急輕重之說, 而爲所瞞過, 尤可見矣.金之倍師瀆告, 果然亶由逞憾而發, 則其爲可罪, 更有甚於無知而妄作矣.非但自處以非門徒而已.斥其學術, 無復餘地, 吾弟以爲疥癬之疾何也? 門外之卒强之迎揖之云, 以辨斥爲迎揖, 天下所未有, 古今所初聞.此猶如此, 他尙何望? 百世之公雖自世, 而吾不與焉, 則公不在吾而, 在吾者私而已.一人之私漸行, 而百世之公, 亦將無賴, 所以古有無勇之譏者也.到吾弟身上, 已無公字, 尙奚暇望百歲之後論其罪乎? 楊墨之言, 初亦不過胡辭亂說, 而竟至盈天下.况金所說, 又非一時胡亂之比.排斥先師學術, 不復明於世, 剝喪斯文殘脈, 人之不仁, 胡至此極, 誠如前日所喩矣.較諸震賊只好自賊, 相萬萬也.吾弟失輕重之權也審矣.或討或否, 豈非矛盾乎? 胡不以討震者, 施之於金則有之, 不以宥金者惠之於震則莫是, 杜撰陳瑧之引不當矣.程子在上而不與之較者, 弟子在下而乃與之辨, 是不成道理.生前死後, 又自有別辨, 其可已乎? 向使程子身後, 無門人之辨, 程子之爲程子, 未可知也.孟子於楊墨之辨, 獨有如不共戴天之讎, 其他未聞也.豈以其忠逆父子之分而辨之加力哉.使金出忮克而奮罵於先師生前, 則自有先師在似推詡, 瀆告之文在於今日, 則在所當辨明矣.吾弟熟讀韓文者.有曰綿綿延延, 浸以微滅, 於其時也, 鼓其邪說而乘之, 嗚呼! 不仁甚矣.旣曰不仁, 而又謂之甚, 則以其正在危急之地, 而惡惡之情, 亦復轉切也.吾弟非不知有此, 而今曰惡惡之情, 亦復轉切勢也, 非義理何也? 先師嘗曰目見父師被誣, 而不知辨討者, 是刀截而不知痛, 此疾之已甚之辭也.事關父師則疾之已甚, 乃爲中道無他而以甚則亂也, 所引韓歐眞劉事誤矣, 彼以議論對待, 此以侵斥犯上, 安可比而同之? 使歐而疑繫辭, 幷疑孔子, 使劉而疑中庸註, 而幷病朱子, 一於排斥如金容承之於先師, 則韓眞豈不以聖門之賊師門之賊討之.而但於無事而己乎? 吾弟謂韓歐眞劉素執不可苟同, 而不同者亦不害爲同爲賢人, 比於對金之事.嗟歎以已矣乎, 不復見斯人以自當之.吾弟固賢矣, 金亦同爲賢人, 無復分崩壞亂劍戟之場, 免夫慘極之禍, 因風想望, 只切歆嘆.金之瀆告, 不爲先師之累, 則先師何以斥退嘉金祭全翁文乎? 於瀆告之瀆字, 累自可見矣.前書云修立揚名, 使天下後世知某之言爲可信者耳.若不如是, 則雖多亦奚益哉? 此分明宜寡無多之謂, 正以吾輩無所修立故也.以前書觀之, 則修立爲本, 辨誣爲末, 今曰辨誣爲本, 修立爲末, 至謂不見察乃至於此, 甚庸愧汗.先師於嘉金祭梅山文, 見卽輒辨, 不淹晷刻, 不遺餘力, 豈好多事而然哉? 亦必有甚不得已者, 存乎其間耳.今之君子, 槩以不辨爲是, 從以爲之,.其亦優勝於前輩而然歟? 吾弟亦欲駸駸於此科, 心竊悶之.不敢自同於韓眞之處, 歐劉所遭, 不但議論之小事, 實關放過師門之賊之爲大故故也.此亦可以爲反隅之資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