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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4
- 서(書)
- 김성구에게 답함 기사년(1929)(答金聖九 己巳)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4 / 서(書)
김성구에게 답함 기사년(1929)
음성의 오진영이 김성장(金聖章)에게 답한 편지를 보니, 괴이한 것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선영감(先令監)이 연원(淵源)을 비난하여 배척했으니 마땅히 절교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본디 저쪽에서 이미 만들어놓은 화두입니다. 이 때문에 오진영은 옥동(玉洞)이 홍성(洪城)을 방문한 것으로 배척하여 연원을 저버리고 선사를 배신했다고 죄목을 삼았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한 줌 일판향(一瓣香)을 공경히 증남풍(曾南豐)을 위해 살랐네."주 71)라는 말을 인용하여 존문(尊門)과 절교하지 않은 것으로 저를 배척한 자는 또한 그의 혈당(血黨)인 권순명(權純命)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우호를 강구하고 의리를 사모하여 부고를 보내지 않았다고 꾸짖고, 유감을 풀자고 청하면서 그대를 끌어들였으니, 이것이 첫 번째 괴상한 일입니다. 또 그가 처음에는 절교를 당할 죄가 없었는데 두 사람의 참소로 인하여 원수와 같아졌기 때문에 그대 선영감 부자에게 죄를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두 사람의 심술이 어떠한가를 논하지 않고 먼저 선영감을 식견이 밝지 못한 부류로 돌린 것이었습니다. 선영감이 충의(忠義)의 대절(大節)에는 밝지만 사정(邪正)의 대분(大分)에는 어둡게 될 것이라고 일찍이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것이 두 번째로 괴상한 것입니다. 또 제가 전(傳)을 변환하여 표(表)로 만들었는데 그가 고쳐 바로잡은 것으로 인하여 원수로 삼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선사의 원고 친필에 매우 분명하게 "전을 고쳐서 표로 하라."는 말이 있는데, 무엇을 보고 변환했다고 하는 것입니까? 대체로 그는 곧 전에 있던 내용을 표에 넣고 표에 있던 것을 전에 넣었지만, 나는 전에 넣고 표에 넣어 애당초 가감이 없었기 때문에 그와 다투지 않았습니다. 그가 조부의 묘문(墓文)을 고쳤다가 오히려 그의 당에게 괴상하게 여겨져 진주본(晉州本)에서 빼버린 것과 어찌 같겠습니까? 지금 마침내 원고의 인가와 관련하여 선사를 무함한 것, 선사의 원고를 어지럽힌 것, 문인을 고소하여 화를 일으킨 것 등 그의 허다한 실제 죄안을 놔두고 전혀 단서도 없고 전혀 관련도 없는 것을 억지로 거론하여 원수로 삼게 된 이유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괴상한 것입니다. 대저 옛날부터 간사한 자는 남을 모함하는데 교묘하였기 때문에 그 정상이 대부분 이와 비슷합니다. 그대가 "오진영의 평생 학문은 원수의 법정에 고소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었다.'라고 한 것은 타당한 단안(斷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으로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또한 무슨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대가 그 편지를 본다면 틀림없이 부당한 일을 많이 했다고 꾸짖을 것입니다.
선사가 선영감과 절교하지 않은 것은 본디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답한 편지에 "나도 기쁘게 들었다.'는 말도 있으니, 굳이 다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오진영이 이미 연원을 저버리고 선사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옥동이 그대 선영감과 절교하지 않은 것을 죄주었으니, 그가 지키는 것은 무참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편지를 써서 선영감을 칭찬하기를 "홍류(洪流) 가운데 하나의 지주(砥柱)이다."라고 하였고, "스스로 생각건대 평소에 절교를 당할 만큼의 죄에는 이르지 않았다."라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의 상(喪)을 듣고는 누차 다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 세상에 양기가 없는 것을 통탄하고 우리 당이 더욱 더 외로워짐을 슬퍼한다."라 하고, 또 "성구(聖九)가 참소를 경솔하게 믿어서 상을 당했는데도 부고를 보내지 않았으니, 사람과 절교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근거가 없는데도 오로지 그대에게만 편지를 보내서 유감을 풀자고 하였으니, 그의 법으로 그의 죄를 다스린다면 참으로 연원을 저버리고 선사를 배신한 자입니다. 말과 일이 모순되어 실상이 드러나는 것은 진실로 소인의 실태입니다. 그러니 위에서 세 가지 괴상하다고 한 것은 또한 괴상한 일도 아닙니다. 다만 이로 인하여 그가 "입수한 무고 안건은, 호남 두세 사람의 날카로운 말과 가혹한 글 외에는 포착할만한 진상이 없다.'라고 한 것을 헤아려보면, 수고하지 않고 알아챌 수 있습니다. 연원을 저버리고 스승을 배반한 죄는 이미 호남 두세 사람을 기다릴 것도 없습니다. 이 편지 가운데 그의 날카로운 말과 가혹한 글을 가지고 진상을 포착할 수 있으니, 선사를 무함하고 선사의 원고를 고치고 사림에 재앙을 일으킨 허다한 죄안도 마땅히 그의 날카로운 말과 가혹한 글로 표현한 허다한 언어와 문자 속에서 진상을 포착할 수 있고 호남의 두세 사람을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오진영의 전수 제자(傳授弟子) 김세기(金世基)의 〈우기(偶記)〉를 최근에 보았는데, "선사가 홍(洪)과 김(金)을 끊은 것에 대해서는 여섯 가지 증거가 있는데, 전(田), 최(崔), 송(宋)가 이미 편지로 화해했다고 하면서 갖은 수단으로 보호하였다. 어찌 선사를 무함하고 가르침을 배반한 자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김세기가 오진영의 이 편지를 보았다면 어쩔 수 없이 선사를 무함하고 가르침을 배반한 죄를 성토하여 방몽(逄蒙)주 72)이 도리어 자신의 스승을 쏜 것처럼 행동하였을 터인데, 아직까지 적막하게 들리는 말이 없으니 무엇 때문이란 말입니까? 오진영이 별지의 말단에 이미 "성구에게 보여주어 나로 하여금 부자 사이에서 난처하게 하지 말라.'고 김성장에게 부탁하고는 마침내 그 문도를 시켜 그대에게 전하게 했던 것은 어찌 부자간을 이간질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스승과 제자 관계는 만법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잔인하게 돌아가신 선사를 무함했으니, 또한 어찌 부자 사이의 윤리를 알겠습니까?
- 주석 71)남풍(南豊)을 …… 못하였네
- 일판향(一辦香)은 오이씨 비슷하게 생긴 향으로, 존경하는 어른을 흠앙(欽仰)할 때 사용한다. 남풍(南豊)은 송나라 때 증공(曾鞏)을 말한다. 그의 제자 진사도(陳師道)가 시 〈연국 문충공 집에서 육일당의 도서를 보고 짓다〔觀兗國文忠公家六一堂圖書〕〉에서 "지난날 한 줌 향을, 공경히 증남풍을 위해 살랐네.〔向來一瓣香, 敬爲曾南豐.〕"라고 하였다. 《後山集 卷1》
- 주석 72)방몽(逄蒙)
- 하(夏) 나라 사람으로 활을 잘 쏜 사람이다. 예(羿)에게 활 쏘는 법을 배웠는데 천하에서 자기보다 나은 자는 오직 예라 생각하고 스승인 예를 쏘아 죽였다. 《맹자(孟子)》 〈이루하(離婁下)〉 여기서는 김세기가 오진영을 공격한다는 의미로 쓰이었다.
答金聖九 己巳
陰震答金聖章書見之, 可怪者不一.謂先令詆斥淵源而當絕, 自是彼邊一副見成話柄.故震既斥玉洞以伏謁洪城, 罪之以負淵源背先師; 引向來一瓣香, 敬爲曾南豐之語, 斥此漢以不絕尊門者, 又渠之血黨權純命也.今忽講好慕義而責其不訃, 請釋憾而援引足下, 此一可怪也.又謂渠初無見絕之罪, 而因二人行讒同仇之故, 得罪於先令監父子, 是則未論二人者之心術如何, 先歸先令監於不明之科, 曾謂先令監明於忠義大節, 暗於邪正大分乎? 此二可怪也.又謂此漢幻傳爲表, 因渠改正而作仇.師稿親筆, 明明有改傳爲表之語, 何所見而謂之幻耶? 蓋渠乃自傳而入表, 自表而入傳, 我則入傳入表, 初無損益, 故不與之爭矣, 豈若渠之改祖墓文, 卻被渠黨見怪, 而拔去晉本也乎? 今乃舍卻渠之誣認、亂稿、訴禍許多實案, 強舉了無端緒了無關涉者, 而作作仇之由, 此三可怪也.大抵自古宵人者, 工於陷人, 故其情狀多類此, 而足下所謂震之平生學問, 以告訴讎庭結局者, 可謂斷案得當矣.人而至此, 又何足論哉? 足下覽此, 應誚其多事也.
先師之不絕先令監, 自有下世前數日答書有"某亦喜聞"之語者在, 不必復言.但震既以負淵源背先師, 罪玉洞之不絕先令監, 則渠之所守, 可謂斬截矣.今作此書, 稱先令監曰"洪流一柱", 曰"自諒平日不至爲見絕之罪", 則故聞志令之喪, 屢與人書曰"痛斯世之無陽, 傷吾黨之益孤", 又曰"聖九輕信讒言, 遭喪不赴, 絕人不當." 若是無據, 專致於座下而求其釋憾, 以渠之法治渠之罪, 眞負淵源背先師者也.言事矛盾, 肝肺綻露, 固小人情態, 向所謂三可怪者, 亦非怪事.但因此而勘渠所謂"所得誣案, 湖南二三人舌尖筆尖外, 無可捉贜"者, 更覺省事.負淵源背先師之罪, 既不待湖南二三人而已.就此書中渠之舌尖筆尖而可捉贜, 則誣先師、改大稿、禍士林許多罪案, 亦當於渠之舌尖筆尖許多言語文字中捉贜, 而不待湖南二三人矣.近見震之傳授弟子金世基《偶記》曰: "先師絕洪、金, 厥有六證.田、崔、宋之謂已以書許解而萬端扶護.豈非誣師背訓者乎?" 其見震之此書也, 不得不討誣背之罪, 而作逄蒙之反射矣.尚寥寥無聞, 何也? 震於別紙之末, 既託聖章以勿示聖九, 使人難處於父子之間, 竟使其徒專致座下者, 豈非欲間人父子者耶? 夫師生者, 萬法之原, 渠既忍陷死師者, 則亦安知父子之倫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