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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4
  • 서(書)
  • 김성구에게 답함 신유년(1921)(答金聖九 辛酉)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4 / 서(書)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04.0001.TXT.0003
김성구에게 답함 신유년(1921)
"현명하고 도량이 넓으며 치우치지 않는 사람은 집사 한 명뿐이다."고 하였는데, 어쩌다가 현명한 견해가 있는 당신에게 이런 평가를 받게 되었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건대 어리석고 비루하여 사람들 중에 가장 못났는데, 다만 타고난 성격이 가볍고 재빨라서 한두 가지 얻어들은 것이 있으면 곧장 감히 강론의 말석에 쏟아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터득한 것이 없기 때문에 또 감히 자신도 독실하게 믿고 타인을 급박하게 배척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다른 사람의 선을 즐겨 말하는 그대가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현명하고 도량이 넓다는 것으로 저를 잘못 칭찬한 것이니, 사실은 그대의 잘못이 아니라 제가 다른 사람을 속인 죄입니다.
치우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경우는 잘한다는 것이 아니라 배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근래에 유문(儒門)이 찢어지고 의론이 대립되었는데, 윗사람은 이미 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아랫사람들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합니다. 일의 시비와 말의 득실을 규명하지 않고, 자기 스승에게서 나왔다면 높이고 떠받치는 것이 너무 지나쳐 태산과 화산도 오히려 낮다고 의심하고, 다른 문하에서 나왔다면 씻어내고 불어내는 것이 너무나 가혹하여 단점이 혹시라도 숨겨질까 두려워하니, 이것은 제가 깊이 미워하면서 통렬하게 징계하는 것입니다. 조석으로 덕을 살펴서 시종 바뀌지 않는 것은 어찌 그대가 저에게만 바라는 것이겠습니까. 제가 그대에게 바라는 것도 이것입니다.
화도(華島)주 7)의 차서(車書)주 8)에 대해 지난번에 줄곧 의심했던 것은 그것이 다만 서로를 친애하는 뜻을 저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에게 여쭈자 과연 생각한 바와 같았지만, 선생은 '그 편지에서 한 말이 너무나 무거우니 온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을 뿐이었습니다. 유자가 삭발을 당하게 되었을 때 자결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가 의를 취했는지를 여부를 허여할 뿐입니다. 일찍이 선생에게 여쭈었는데, "비록 문묘에 배향할 수는 없어도 사숙(私塾)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가능하다."주 9)고 하였습니다. 이미 사숙에서 제사지내는 것을 허여했는데, 어찌 일찍이 그 의리를 인정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한 번 삭발을 당한 것이 모두 쓸모가 없다."는 말은 아마도 전한 사람의 잘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겁탈을 당하여 자결한 열부(烈婦)에 관한 글을 《약재집(約齋集)》에서 삭제한 것은 혹 한결같이 찬양만 하고 억양(抑揚)과 포폄(褒貶)의 뜻이 없기 때문입니까? 《약재집》을 교정할 때 유영선(柳永善)이 명을 받아 삭제했으니, 유영선이 일찍이 "때때로 한 번씩 이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항상 편치 않다."라고 하였습니다.
'청나라 유자[淸儒]' 운운한 것은 마땅히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여 여쭈어야 합니다만 질문한 본뜻을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본래 명나라 사람인데 청나라 유자가 된 자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본래 청나라 사람으로서 청나라 유자가 된 자입니까? 국초의 청나라 유자를 말한 것입니까? 또는 나라를 세우고 오래 시간이 지난 뒤의 청나라 유자를 말한 것입니까? 또한 청나라 유자가 스스로 처신한 의리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후세 사람이 청나라 유자를 처리하는 의리입니까? 다음 편지에서 다시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주석 7)화도(華島)
전라북도 부안군에 있는 계화도(界火島)인데, 간재가 이곳에 정착하여 수학을 하며 중화(中華)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계화도(繼華島)라고 고쳐 불렀다.
주석 8)차서(車書)
車氏가 보내온 편지를 이른 듯하다.
주석 9)비록……가능하다
간재는 "선비가 삭발당하여 자살하는 것은 욕을 당한 부녀와 의리가 동일한 것이니, 그 문도들이 사숙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가능하다.〔士子被削而卽自裁者.亦宜與受辱婦女同一義理.其門徒祭之私塾則可〕"라고 하였다. 《간재집(艮齋集)후편》 권17 〈華島漫錄〉
答金聖九 辛酉
"明洪不偏, 執事一人"之喩, 何以得此於明見? 殊不可曉.自惟昏滯隘陋, 最出人下, 而但姿性輕儇, 才有一二口耳之得, 輒敢傾瀉於講論之末.然惟其無實得也, 故又不敢信己篤而排人急.是故足下樂道人善, 而未及細察, 誤以明且洪稱之, 實則非足下之誤也, 乃僕欺人之罪也.至於不偏之云, 非曰能之, 而願學焉者也.近世儒門岐裂, 議論角立, 上既不免, 而下益甚焉.不究事之是非、言之得失, 出自其師, 則尊戴太崇, 嫌泰華之猶卑; 出於他門, 則洗吹太苛, 恐疵瘢之或隱, 此僕所深惡而痛懲者也.朝夕觀德, 終始不替, 豈惟足下之所望於僕? 僕之望於足下者亦此也.華島車書向固疑, 其爲只謝相愛之意, 及稟先生則果如所料, 而但以那書命語太重, 爲未穩云矣.儒者被削自裁者, 許其取義與否.曾己稟質師門, 答謂雖不可從享文廟, 而祭之私塾則可也.既許其祭之私塾, 則何嘗不與其義乎? 乃知"一被削都無用"之語, 蓋傳者之過也.若其删"遇劫自裁之烈婦"文字於《約齋集》者, 或以其一味贊揚, 而無抑揚褒貶之意故耶?《約集》之校也, 柳永善承命删出, 而柳嘗言"時一念此, 心常不安"云矣."清儒"云云, 當依敎轉稟, 而不詳發問本意, 謂自明人而爲清儒者耶? 本清人而清儒者耶? 謂國初之清儒耶? 立國久後之清儒耶? 且謂清儒自處之義耶? 後人處清儒之義耶? 後囬更示爲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