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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3
  • 서(書)
  • 오극경에게 답함 기묘년(1939)(答吳極卿 己卯)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3 / 서(書)

자료ID HIKS_Z038_01_B00001_001.003.0001.TXT.0024
오극경에게 답함 기묘년(1939)
편지에서 가르쳐주신 여러 조목은 정밀하게 생각하여 얻은 실제적 견해로서 게으름피우지 않는 훌륭한 뜻에서 나왔으니, 더욱 절실하게 기쁩니다. 형의 조예가 보통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점을 깊이 알게 된 만큼 의심나는 것을 강론하여 학문을 진전시킬 곳이 있음을 다행스럽게 여기니, 감히 더욱 신중히 생각하여 은혜를 끝까지 받을 바탕으로 만들 것을 청하지 않겠습니까? 일찍이 맹자의 책을 읽어보니 공손추가 "안연은 공자에 대해 전체는 갖추어졌지만 미미하다"주 81)고 말했는데, 맹자는 그릇되다 여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고, 공손추가 또 이미 "옛날에 가만히 들었다."라고 말했으니, '전체는 갖추어졌지만 미미하다'는 말이 선철(先哲)로부터 나온 정론이라는 것을 역시 알겠습니다. 이 말을 가지고 논해보건대, 이제 퇴계를 주자와 비교할 때 "전체는 갖추었지만 미미하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은 듯하지만 후학이 감히 가벼이 판단할 바가 아니라고 경계하셨으니, 형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그 말이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말하는 자가 타당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죄를 알겠습니다. 선배들은 '퇴계(이황)와 우암(송시열)은 모두 주서(朱書)에서 힘을 얻었는데, 퇴계는 학문의 공을 터득하였고, 우암은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의리를 얻었다'고 말하니, 사람들은 모두 명언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인의 일체(一體)만 얻었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이것으로 저의 의론과 비교해보면 또한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원컨대 다시 가르침을 주셨으면 합니다.
퇴옹이 후비(後妣)에 대해 별도로 신주 독을 만들고 별도로 탁자를 만든 일주 82)은 이미 감히 알 수가 없었고, 보내주신 편지에서 신주를 꺼내 나란히 제사 지내는 것이 재취와 삼취에까지 미치는 것을 더럽고 모독적인 행위로 여기는 것이라고 하신 것도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처(妻)라는 글자는 가지런하다는 뜻인데 초취(初娶)가 이미 남편과 몸을 가지런히 하여 동독동탁(同櫝同卓)했다면, 재취와 삼취는 초취를 이어서 배우자가 되었으니, 어찌 남편과 몸을 가지런히 할 수가 없는 어떤 이유가 있기에 별독별탁(別櫝別卓) 합니까? 아마 혹시라도 남편 한 명과 아내 세 명이 탁자를 함께하여 제수를 먹는 것을 산사람의 일로 보면 부끄러울 수가 있기 때문에 더럽고 모독적이라고 말한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비록 초취가 한 사람일지라도 역시 어찌 남녀가 동탁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의 견해는 상처(喪妻)한 이후에 육례를 갖추어 장가를 드는 경우라면 비록 열 번 장가 들더라도 모두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여기는데, 잘 모르겠으나 어떻습니까? 승중(承重)을 한 자의 처는 시어머니와 시할머니가 살아계시는 경우에 남편의 상복을 따르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가례》에는 다만 남편이 승중하면 상복을 따라 입는다고만 하고 시어머니와 시할머니가 살아계신 경우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통전(通典)》주 83)에서 하순(賀循)은 "남편이 조부, 증조부, 고조의 뒤를 이은 후계자라면 그 처는 남편을 따라 상복을 입는다"고 말했습니다. 장자(장재)의 설도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퇴계가 이른바 '예에서 증손이 증조의 승중이 되면 그 조모나 어머니가 생존한 경우 이들은 승중복(承重服)을 입고 처는 승중복을 입지 못한다'라고 한 것은 어떤 책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의심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이제 《가례증해(家禮增解)》에서 인용한 퇴계설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인이 남편의 조부모에 대하여 남편이 승중을 했다면 따라서 상복을 입으니, 이제 증손, 현손이 증조와 고조의 상복을 입으면 그 처는 마땅히 남편을 따라 입어야 합니다. 그 어머니 같은 경우는 아마도 이른바 '시아버지가 죽으면 시어머니는 늙은 것이다'주 84)라는 것으로, 이미 주부의 일을 며느리에게 맡겼을 것이니, 아마도 상복을 입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기》 〈상복소기〉에서는 '속종(屬從)의 경우는 따라서 입는 그 사람이 죽어도 상복을 입는다'주 85)고 하고, 공영달의 소(疏)에서는 '속종은 세 경우가 있다. 아내가 남편을 따라 남편의 친당(親黨)의 복을 입는 것이 그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으니, 이에 근거한다면 남편이 비록 이미 죽었다 하더라도 그 처는 마땅히 상복을 입어야 합니다. 전중(傳重)하여 증복(曾服)과 현복(玄服)에 이르면, 그 이상의 죽었을 때 복을 입지 않는 경우는 복을 입은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은 증손과 현손으로 승중한 자의 처는 마땅히 따라서 상복을 입는다는 것을 주로 말했고, 아울러 시어머니와 시할머니도 역시 삼년복을 입는다는 것을 말했으니, 이전에 퇴옹이 예를 인용하여 정도가에게 답하면서 '따라 입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는 완전히 상반됩니다. 이 설이 전집 몇 권에서 보이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마 마땅히 이것을 정론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취사할 것을 알 수 있다면, 부부가 친히 제사를 지낸다는 사실은 그 속에 포함되어 있어 굳이 논할 필요는 없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제반(祭飯)주 86)의 설에 대하여 제가 퇴옹의 뜻과 형의 견해를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모두 매번 밥 먹을 때마다 고수레를 권하는 것이 괴상한 취급을 받고 억지로 중단하는 것이 비웃음을 산다고 했지만, 한번도 예로 따지면 타당하지 않아 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심력(心力)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다른 사람들이 비록 괴상히 여기고 비웃더라도 스스로는 괴상하고 비웃을만하다 여기지 않고 행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될 것입니다. 굳이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역시 단지 말을 해야 합니다. 어찌 이런 심력을 갖출 수 있겠습니까. 예는 그 끝을 말해야 하고, 의리는 그 정밀함을 규명해야 하니, 평소에 미리 강론하고 일에 임하여 더욱 권면하는 것은 본래 선비들이 서로에게 보태주는 참된 실체이니 어찌 괴상한 취급을 당하는 데에 이르겠습니까. 행하는 것이 미숙하기 때문에 권면하여 이르도록 하는 것은 또한 중등 수준 이하의 사람이 노력하는 상사(常事)이니, 어찌 억지로 한다는 혐의가 있겠습니까. 제사는 폐할 수 없기 때문에 신에게 흠향드림에 있어 예를 갖추고자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밥 먹을 때와는 똑같이 할 수 없다는 말씀'은 비록 신을 중시하고 사람을 가벼이 여기는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더라도, 만약 그 근본을 깊이 탐구해보면 신도 역시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것일 뿐입니다. 반드시 그를 위해 대신 제사지내는 것은 그 생전에 매번 술과 밥에 고수레를 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에 대해서도 오히려 그를 위해 대신 제사를 지내거늘 하물며 산 사람이 스스로 고수레를 할 수 있음에는 말해 뭐하겠습니까. 또한 관례의 초례와 혼인의 동뢰례 그리고 마을의 음주례는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역시 사람이 스스로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두 일찍이 술과 포로 고수레를 하는 절차를 폐하지 않았다면, 유독 평상시 밥 먹을 때에 유추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까?
포은의 출처는 천고의 의심스러운 안건입니다. 당신은 우왕과 창왕이 진실로 폐할만한 흠집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폐하고 쫓아내는 것도 포은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포은의 마음은 또한 이윤과 곽광의 마음주 87)입니다. 폐할만한 것이 있어서 폐하였는데, 불행한 것은 그와 도모한 자들이 몰래 천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옹의 뜻이 후세에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은 천고의 탁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만 같을 수는 없으니, 우왕이 정말로 폐할만한 죄가 있음을 원나라 사신을 맞이한 일을 하나의 증거로 삼을 수 있다 말한다면, 그가 즉위한 원년에 이미 그랬던 것이고, 이인구로 하여금 권력을 멋대로 행하여 전녹생(田祿生)과 박상충(朴尙衷)을 죽이게 하였습니다. 즉위한지 3년에는 또 사신을 파견하여 원나라에 가게 했으니 포옹의 이윤과 곽광같은 마음이 어찌 이때에 있지 않고 14년에 조선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왕에게 자리를 피해달라고 청한 날에 비로소 이런 마음이 있었습니까. 우왕이 태조로 하여금 요동을 정벌하게 한 것은 당시에 목자(木子)가 왕이 된다는 참위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최영 장군과 도모하여 정벌하러 가는 일을 이용하여 제거하려고 했고 태조도 우왕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회군하는 날에 최영장군의 죄목을 나열하고 그를 제거하기를 청했고 마침내 왕을 폐하는 거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포옹이 어찌 태조와 함께 왕을 폐하는 것을 도모하는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불행한 것은 그와 더불어 도모한 자들이 몰래 천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뜻이 후세에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을 감히 필연이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또 창왕이 겨우 아홉 살이고 재위에 오른 지 1년 되었는데 어찌 폐할만한 하자가 있어서 그를 폐했겠습니까? 당시 조정 신하들의 의론은 전왕의 부자관계 내력이 불명확하다는 것에 겨우 의존을 했습니다. 우왕과 창왕이 진실로 폐위되어 쫓겨날 만하다면, 폐위되고 쫓겨난 것 역시 포옹의 마음이라는 것을 진실로 믿을 만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마음에서 구해보면 그런 것이 없지만 그의 자취를 살펴보면 그런 점이 있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평상시에 이 점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생각해봤지만 말이 되지 않으므로 마침내 참으면서 마음을 돌이켜 후공을 도모했다는 설을 모색했는데 고명하신 그대에게 심하게 반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포옹이 성인이 아닌데 도를 밝히고 공을 계산하지 않는 의리에 대하여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다하지 않은 것이 있음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또 단종 때 생육신으로 세조 때에 벼슬을 면하지 못한 사람들은 분명히 후공을 도모하다가 후에 목숨을 버리고 의리를 취했습니다. 후현들 중 인물에 대해 잘 논하는 사람들이 어찌 이들을 정충대절로 인정하기를 퇴계가 포옹에게 한 것처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감히 "사람을 취하여 그 마음을 논한다면 하자가 없으나 충절에 대하여 의리를 논하고 지극히 타당함을 구한다면 교훈으로 삼을 수 없다"고 했는데, 또 다시 어떻게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주석 81)안연은……미미하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옛적에 제가 들으니 '자하, 자유, 자장은 모두 성인의 일부분만을 가지고 있었고 염우, 민자, 안연은 전체를 갖추고 있었으나 미약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누구를 자처하십니까?〔昔者竊聞之 子夏子游子張 皆有聖人之一體 冉牛閔子顔淵 則具體而微 敢問所安〕"라고 하였다.
주석 82)퇴옹이……일
《퇴계집(退溪集)》 권37 〈유희범에게 답함〔答柳希范〕〉에 "사당의 신주는 두 비(妣)를 하나의 감실에 모시지만, 선비(先妣)는 하나의 독(櫝)에 함께 모시고 후비(後妣)는 독을 따로 하여 별도의 상에 안치한다.(祠堂神主.則兩妣同入一龕.而先妣共一櫝.後妣別櫝.安別牀)"라고 하였다.
주석 83)《통전(通典)》
당의 두우(杜佑 : 735~812)가 편찬한 도서명이다. 《통전(通典)》에는 당우(唐虞)에서부터 아래로는 당의 숙종ㆍ대종 때까지의 전장제도가 기록되어 있다.
주석 84)시아버지가……것이다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시어머니는 늙은 것이다. 〔舅没則姑老〕" 하고, 그 주석에 "이는 집안일을 맏며느리에게 전하는 것을 말한다. 〔謂傳家事於長婦也]〕" 하였다.
주석 85)속종(屬從)의……입는다
《예기(禮器)》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종복의 경우에는 소종이 죽으면 상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속종의 경우에는 소종이 죽어도 상복을 입는다.〔從服者, 所從亡則已; 屬從者, 所從雖沒也 服〕" 하였다. 종복(從服)은 따라서 입는다는 뜻으로, 인친(姻親)이나 임금의 친속을 위해 상복을 입는 것을 말하는데, 정현(鄭玄)은《예기》〈대전(大傳)〉의 주(註)에서 "종복은 예컨대 남편이 아내의 부모를 위하거나, 아내가 남편의 친당을 위해 상복을 입는 것과 같은 것이다. 〔從服, 若夫爲妻之父母, 妻爲夫之黨服〕" 해설하였다. '소종(所從)'은 종복을 하는 사람이 '따라서 입는 그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내에게는 남편이 소종이 된다. '속종(屬從)'은 종복이면서 친속 관계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공영달(孔穎達)은 소(疏)에서 "자식이 모친을 따라 모친의 친당의 복을 입는 것, 아내가 남편을 따라 남편의 친당의 복을 입는 것, 남편이 아내를 따라 아내의 친당의 복을 입는 것이다.〔一是子從母服母之黨, 二是妻從夫服夫之黨, 三是夫從妻服妻之黨〕" 하였다.
주석 86)제반(祭飯)
끼니마다 밥 먹기 전에 밥을 조금 떠내어 곡신(穀神)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고수레로, '제반(除飯)'이라고도 한다.
주석 87)이윤과 곽광의 마음
이윤은 탕왕(湯王)을 도와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멸망시키고 난세를 평정한 뒤에 선정을 베푼 상(商)나라의 명재상이다. 뒤에 탕왕의 적장손인 태갑(太甲)이 포학하게 굴자 동궁(桐宮)으로 축출했다가 그가 개과천선하자 3년 뒤에 다시 영입하여 복위시켰다. 곽광은 한나라 소제(昭帝)가 죽은 뒤에 후사가 없었으므로 대장군(大將軍)으로서 무제(武帝)의 손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맞이해 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는데, 유하는 몹시 황음무도(荒淫無道)하여 제멋대로 하면서 간하여도 따르지 않았다. 이에 곽광은 창읍왕을 즉위시킨 지 27일 만에 폐위하고서 다시 무제의 증손인 유순(劉詢)을 맞이해 와 즉위시켰는데, 이 사람이 바로 선제(宣帝)이다. 《한서(漢書)》 권68 〈곽광전(霍光傳)〉
答吳極卿 己卯
惠教諸條, 得於精思之實見, 而出於不倦之盛意, 尢切欣荷. 深知吾兄造詣逈出尋常. 而自幸講疑進學之有所, 敢不益加慎思, 以請作受卒惠之地也? 嘗讀孟子之書, 有公孫丑謂顏淵之於孔子, 具體而微, 而非惟孟子不以爲非, 丑又既云昔者竊聞之, 則出自先哲定論, 亦可知矣. 以是論之, 今謂退溪之於朱子"具體而微者", 恐無不可, 而見戒以非後學之所敢輕斷, 未詳尊意攸在. 抑謂言則非曰不可, 但以言之者, 非其人故耶? 然則知罪矣. 前輩有言'退溪尢庵俱得力於朱書, 而退溪得學問之功, 尢庵得尊攘之義.' 人皆以爲名言. 此則不爲只得一體之說乎? 以之視鄙論, 又以爲如何? 願有以再教之也.
退翁之於後妣別櫝別卓者, 既不敢曉. 來示以出主并祭, 及於再三娶爲凟亂者, 亦所未喻. 妻之爲言齊也, 初娶既以與夫齊體, 而同櫝同卓, 則再三娶是繼初娶而爲配者也, 有何不得與夫齊體之故, 而別櫝別卓耶? 豈或以一夫三妻同卓而食, 觀以生人事, 則爲可羞, 故謂凟亂耶? 若然則雖初妻一人, 亦豈不爲男女同卓之可羞乎? 故淺見以爲喪妻後, 具六禮而聘者, 則雖十娶, 皆當無差別, 未知如何? 承重者之妻, 其姑若祖姑在者, 從夫服當否? 家禮但言夫承重則從服, 而不言其姑若祖姑在則否. 通典賀循曰"其夫爲祖曾高祖後者, 其妻從服." 張子說亦同然. 則退溪所謂'禮, 曾孫承重 其祖母或母在而服重服, 妻不得承重者', 未知出自何書, 故有所疑也.
雖然, 今見《家禮增解》所引退溪說, 有曰"婦人之於夫之祖父母, 夫承重, 則從而服之." 今曾玄孫之服曾高祖也, 其妻當從服矣. 若其母, 恐所謂舅沒則姑老, 已付主婦之事於婦矣, 疑若不當服. 然〈喪服小記〉, '屬從者, 所從雖没也, 服.' 疏曰屬'從三, 妻從夫, 服夫之黨, 一也.' 據此則其夫雖已死, 其妻亦當服矣. 盖傳重而至曾玄之服, 其已上死不服者, 與服同也." 此則主言曾玄孫承重者之妻, 當從服, 并言其姑若祖姑, 亦服三年也, 與向所引禮以答鄭道可而謂不從服者, 正相反矣. 未知此說見於全集何卷, 而恐當爲定論. 此可以知所取舍矣, 則夫婦親祭, 自在其中, 而不必論也, 何幸何幸?
祭飯之說, 竊詳退翁之意․尊兄之見, 皆只以每食勸祭之取恠, 強作間斷之取笑, 未嘗以爲禮所未當, 而謂不可行也. 然則心力出人, 人雖恠笑, 不自以為恠笑, 而行之不已, 則可矣. 不必多說, 然如弟者, 亦只是說耳. 何能辧得這般心力? 夫禮言其極, 義究其精, 平日之預講, 臨事之更勸, 自是士子相益之實諦, 何至於取恠? 行之未熟, 勉而及之, 亦爲中人以下之常事, 何嫌於強作也? 祭祀不可廢, 享神欲以備禮, 不可與自食同之喻, 雖仰悉重神輕人之意, 若深究其本, 則神亦生人之死者耳. 必爲之代祭者, 以其生前之每祭酒食也. 死者猶爲代祭, 况生者之能自祭乎? 且也冠之醮禮, 婚之同牢禮, 鄉之飲酒禮, 此非事神, 而亦人之自食也. 皆未嘗廢祭酒祭脯之節, 則獨不可以反隅於平常食時乎?
圃隱出處, 千古疑案. 而尊喻禑昌固有可廢之釁, 廢之逐之, 亦圃翁之心也. 圃翁之心, 亦伊霍之心也. 因其可廢而廢之, 不幸與之謀者, 陰受天命. 故圃翁之志, 未明於後世者, 亦可謂千古獨見. 然終有不能如痒得爬者, 謂禑誠有可廢之罪, 而以迎元使證其爲一端也, 則於其卽位元年已然, 而使李仁矩專權殺田祿生朴尙衷, 三年又遣使如元, 圃翁伊霍之心, 胡不在此時, 乃於十四年, 韓太祖自威化回軍, 請王避位之日, 始有此心耶? 盖禑之使太祖伐遼東, 以時有木子爲王之讖. 故謀諸崔瑩, 欲因事除之, 太祖亦知禑意. 故回軍之日, 數崔瑩之罪, 請去之, 而竟有廢王之舉. 當是時也, 圃翁豈有與太祖同謀廢王之理乎? 然則不幸與之謀者, 陰受天命. 故志未明於後世者, 未敢信其必然也. 且也昌才九歲在位一年者, 有何可廢之釁而并廢之耶? 當時廷臣議者, 亦不過託以前王父子來歷不明. 然則禑昌固可廢逐, 廢逐亦圃翁心者, 固可謂信然乎? 求其心則無之, 觀其跡則有之. 尋常於此, 反覆思之, 求說不得, 故有隱忍遷就, 以圖後功之說, 而深見誅於高明. 然圃翁要亦非聖人, 則於明道不計功之義, 安知不容有一毫不盡. 且莊陵之六臣, 不免仕於光陵者, 明是圖後功, 而及其捐生取義之後. 後賢尙諭者, 孰不以精忠大節許之, 如退溪之於圃隱乎? 吾故敢曰"就人而論其心, 則無間, 然於忠節講義而求至當, 則不可以爲訓," 未知高見, 復以爲如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