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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3
- 서(書)
- 오극경병수에게 답함 정축년(1937)(答吳極卿秉壽 ○丁丑)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3 / 서(書)
오극경병수에게 답함 정축년(1937)
근래에 나아가 배알했는데, 자취는 우연인 것 같지만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모색한 것입니다. 받들어 대면함에 있어 꾸밈없이 정성껏 맞아 주시고,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말씀을 해주시니 안색은 오랜 친구와 같고 마음은 전일했습니다. 한 마디 말로 일생의 사귐을 정하고 세 잔의 술로 세 희생의 피를 대신하니, 제 소원이 비로소 이루어지고 바람이 성취되었습니다. 마음속으로 궁핍한 인생에서 즐거운 일은 이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말년에 익우(益友)를 얻은 것은 개인적으로 다행이니, 복분(福分)이 적지 않습니다. 돌아와서도 내내 마음이 흡족했는데 우러러 두터이 내려주신 은혜에 감사할 겨를도 없이 먼저 보내주신 편지를 또 받았습니다. 비할 데 없는 한때의 거친 논설을 인자(仁者)가 정중히 말해주는 예로 간주해주시고, 심지어 '하늘이 우리 노형을 사랑하여 다시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는 말씀을 하시니, 베풀어준 것은 없는데 보답만 받는 것 같아 부끄러워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산에 있는 돌이 비록 거칠지라도 옥을 가는 데에는 유용하고주 54), 초나라 수도 영에서 보낸 편지가 비록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연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으니주 55), 형 같은 사람은 취하여 미루어나가는 것주 56)을 잘하여 인을 실천하는데 뛰어나다 할 것입니다. 아! 사람이 서로를 아는 것은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선비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편지로 교류한다고 명분을 삼고는 더러 자신의 학문을 믿고 잘난 체 하여 정성껏 접대하려 하지 않기도 하고, 더러 단점과 졸렬함을 감춘 채 물어서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죽을 때까지 추종하면서도 끝내 겉으로는 노나라와 위나라처럼 가까이 지내지만 속으로는 연나라와 월나라의 거리만큼 먼 것을 면하지 못하는 자들은 역시 도대체 무슨 마음입니까? 저는 평소에 이런 무리들이 하는 짓을 부끄럽게 여기고 항상 옛사람 대장부의 심사(心事)를 사랑하여 '푸른 하늘에 뜬 밝은 해는 사람마다 볼 수 있다'주 57)는 말씀과 같은 내용을 삼가 배우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우리 형을 만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주자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의 만사는 순식간에 변하고 사라지니 모두 마음속에 담아둘 만한 것은 없고, 오직 책을 읽어 이치를 궁구하는 것주 58)이야말로 구경법(究竟法)주 59) 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늙었고 세상과는 어긋났습니다. 푸른 등불 아래 누런 책을 보면서 옛 철인이 남긴 단서를 찾고, 차가운 물과 가을의 밝은 달에서 이 마음이 철저히 밝은 것을 보아서 이른바 구경법이라는 것을 구하니, 우리 형과 함께 서로 권면하기를 바랍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책은 다만 읽은 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이치는 다만 궁구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되니, 요컨대 마땅히 스스로 터득한 지취(志趣)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보내준 편지에서 말씀하신, 기쁨을 얻은 것도 많고 의심나는 것도 많다는 것이니, 생각이 이미 절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무릇 기쁨과 의심이 절반인 경우가 자득할 수 있는 방아쇠가 됩니다. 모두 의심만 하고 즐거워할만한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정말로 의심일 뿐입니다. 모두 기쁘기만 하고 의심나는 것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또한 참된 기쁨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의심나는 것을 가지고 기뻐할 수 있는 것에 투영시켜서 통하게 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참으로 기뻐하면서 자득할 수 있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보내온 편지에서는 어찌 기뻐할 것과 의심나는 것을 한두 가지 언급하여 강론하면서 서로를 성장하게 하는 바탕으로 삼지 않으십니까? 이후에는 다시 이렇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 주석 54)다른……유용하고
- 《시경(詩經)》에서는 "학이 구고에서 울거든 소리가 들에 들리니라. 고기가 잠겨 깊은 못 속에 있고 혹은 물가에도 있도다. 즐거운 저 동산에 심어놓은 박달나무여, 그 아래 낙엽이 떨어지는구나. 타산의 돌은 숫돌이 될 수 있느니라.〔鶴鳴于九皐, 聲聞于野. 魚潛在淵, 或在于渚. 樂彼之園, 爰有樹檀, 其下維蘀. 它山之石, 可以爲錯〕"라 했다. 《시경(詩經)》 〈소아·학명(小雅·鶴鳴)〉
- 주석 55)초나라……되었으니
- 원래의 뜻을 잘못 이해하여 와전(訛傳)하는 것을 이른다. 옛날 중국의 영(郢) 지방 사람으로 연(燕)나라 상국(相國)에게 편지를 쓴 자가 있었는데, 등불이 어둡자 옆 사람에게 촛불을 들라고 말하고는 자기도 모르게 편지에 '촛불을 들라'고 썼다. 그런데 연나라 재상이 그 편지를 받아 보고는 기뻐하기를, "촛불을 들라는 것은 현자를 천거하여 쓰라는 말일 것이다." 하고는 곧 임금에게 아뢰어 그대로 실천하니, 연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한비자(韓非子)》 〈외저설(外儲說) 좌상(左上)〉
- 주석 56)취하여……것
- 공자가 "무릇 인자(仁者)는 자기가 서고자 할 때 남을 세우며, 자기가 도달하고자 하면 남을 도달하게 한다. 가까운 자신에게서 취하여 먼 곳의 남에게 미루어 간다면 인을 실천하는 방법이라 말할 수 있다.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하였다. 《논어(論語)》 〈옹야(雍也)〉
- 주석 57)푸른……있다
- 숨김없이 솔직히 드러난다는 뜻이다. 안동의 늙은 아전 권후중(權後重)이 상납색(上納色)으로 서울에 올라와 송시열을 만나고는 송시열의 거취(去就)에 대해 말하였다. 그 뒤에도 가끔 왕래하였으므로 송시열이 손수 "청천백일 인득이견지(靑天白日人得而見之)" 여덟 자를 대자(大字)로 써 주었다.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 권8
- 주석 58)책을……것
- 《주자어류(朱子語類)》 권8에는 '이치를 궁구하고 자신을 수양함〔窮理修身〕'이라고 되어 있다.
- 주석 59)구경법(究竟法)
-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뜻하는 불가(佛家)의 용어로, 최고 경지의 원리를 뜻한다.
答吳極卿秉壽 ○丁丑
頃者造拜, 跡若偶緣, 心則積營. 及其承接也, 則削邊之欵, 由中之辭, 面如舊而心惟一, 一言以定一生之交, 三杯以替三物之血, 願始遂而望不負矣. 自以爲竆生快事, 無過於此. 而晚得益友, 私幸, 福分不淺. 歸猶充然, 仰謝厚賜之不暇, 乃承先書. 將一時荒蕪無倫之說, 看作仁者鄭重贈言之例, 至有天惠我老兄, 更起精神之喻, 無施受報, 愧不敢當. 然他山之石雖麁, 而功於攻玉; 郢都之書雖誤, 而資於治燕, 若兄者可謂善取譬而巧爲仁也. 嗟呼! 人之相知, 貴相通心, 士子爲尢甚. 彼名爲文字之交, 而或恃學自高, 不肯欵接, 或護短藏拙, 恥於問學, 終身追逐, 而卒不免靣魯衛而心燕越者, 亦獨何心? 區區平生羞作此輩之為, 常愛古人大丈夫心事, 如青天白日, 人得見之之語, 竊願學之. 而今始遇於吾兄, 何幸何幸? 朱夫子不云乎? '世間萬事, 須叟變滅, 舉無足置胷中, 惟有讀書竆理, 爲究竟法,' 吾儕俱老矣, 且世與違矣. 青燈黃卷, 尋曩哲之遺緒; 寒水秋月, 見此心之照徹, 以求所謂究竟法者, 願與吾兄交勖焉. 雖然, 書不可以徒讀, 理不可以徒竆, 要當有自得之趣. 此則來書所謂得喜處多, 得疑處亦多者, 已思過半矣. 盖喜疑相半, 自得之機關, 皆疑而不知有可喜, 固是疑也. 皆喜而不知有可疑者, 亦未爲真喜. 若能將可疑者反映於可喜者而通之, 則是可謂真喜而爲自得也. 今於來書, 胡不以可喜可疑者一二示及, 而作講明相長之資也? 後勿復然是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