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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
- 서(書)
- 간재선생에게 올림 을사년(1905) 10월(上艮齋先生 乙巳 十月)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1 / 서(書)
간재선생에게 올림 을사년(1905) 10월
삼가 제가 오늘날의 형세를 살펴보니, 서리를 밟아 이르는 얼음이 이미 단단해졌고주 1) 새가 기미를 보고 날아오를 때는 이제 못 잡게 되어버렸습니다.주 2) 치발(薙髮)주 3)은 뒷날에 닥쳐올 일이지만 검은 양복은 이미 눈앞에 와 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일이 보통 사람의 눈에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춘추(春秋)》의 의리에 있어 실로 경중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시경》의 〈정시(鄭詩)ㆍ치의(緇衣)〉주 4) 편을 인용하여 의리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더러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약 옛사람의 일을 근거로 말을 한다면, 치의(緇衣)주 5)는 오래되었는지라 굳이 말할 것이 없거니와, 머리를 자르는 일주 6)로 말하자면 성탕이 비 내리기를 기도하고주 7) 태백이 나라를 양보한 일주 8) 같은 경우는 역시 혹 부득이한 상황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검은 양복을 입는 까닭은 우리가 옛사람을 따르고자 해서가 아니라 저들이 조약을 따르도록 협박한 데서 나왔으니 어찌 이 고사들을 끌어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두 마디 말로 이런 상황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공자께서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일을 가지고 머리를 풀어 헤치는 일과 병칭하셨으니, 검은 양복과 치발이 경중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이미 굳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맹자가 오십 보를 도망간 자와 백 보를 도망간 자가 다를 바 없다주 9)고 하셨으니, 비록 둥근 소매 옷에 큰 띠를 두르는 우리 복장에 검은 저고리 하나만 착용한다고 하더라도 오랑캐를 따르는 것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〇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였다. "검은 양복을 입는 것과 머리를 자르는 것이 오랑캐의 제도인 것은 똑같다. 어떤 이들이 (이 둘을 놓고) 경중과 시비를 나누지만, 그대가 그렇지 않다고 여긴 견해가 맞다. 근래에 내가 지은 〈종중시중변(從衆時中辨)〉한 편이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을 비판하여 깨뜨린 것인데, 지금 겨를이 없어 적어 보내지 못한다."
- 주석 1)서리를……단단해졌고
- 《주역(周易)》 〈곡괘ㆍ초육(坤卦ㆍ初六)〉에서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른다(履霜堅冰至)"고 하였다. 《정전(程傳)》에서는 "음(陰)이 처음 아래에서 생겨나니, 지극히 미약하지만 성인은 음이 처음 생겨날 때, 음이 장차 자라날 것을 경계하였다. 음이 처음 응결하여 서리가 되는데, 서리를 밟으면 음이 점점 성하여 단단한 얼음에 이를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소인이 처음에는 비록 매우 미약하지만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되니, 자라나면 성함에 이르는 것과 같다〔陰始生於下, 至微也, 聖人於陰之始生, 以其將長, 則爲之戒. 陰之始凝而爲霜, 履霜則當知陰漸盛而至堅冰矣. 猶小人始雖甚微, 不可使長, 長則至於盛也〕"라 했다. 즉 이 말은 음이 왕성한 시기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그 기미가 나타났다는 뜻으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매우 위급함을 나타낸다.
- 주석 2)새가……되어버렸습니다
- 《논어(論語)》 〈향당(鄕黨)〉, "새가 사람의 기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면 날아올라 빙빙 돌며 살펴보고 나서 내려앉는다〔色斯擧矣 翔而後集〕"고 하였다. 이는 사람이 어떤 기미를 보고서 신속하게 행동을 취해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
- 주석 3)치발(薙髮)
- 변발(辮髮)ㆍ편발(編髮)ㆍ승발(繩髮)ㆍ삭두(索頭)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앞머리 부분은 깎고 후두부 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묶는 것을 말한다. 여진족과 몽고족이 이러한 형태를 취하였고, 한족은 속발(束髮)의 형태를 취하였다. 이곳에서 치발은 일본의 압제 하에 발령된 단발령을 의미한다.
- 주석 4)정시(鄭詩)ㆍ치의(緇衣)
- 치의(緇衣)는 검은 옷이라는 뜻이다. 모시(毛詩)에서는 경사(卿士)들이 입조할 때 입는 정복(正服)이라고 하였다. 이 시는 《시경(詩經)》 〈정풍(鄭風)〉의 첫 번째 시로 검은 옷을 입은 현사(賢士)를 예우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예기(禮記)》 〈치의(緇衣)〉에 "현인을 좋아하기를 〈치의(緇衣)〉 시처럼 하고, 악인을 미워하기를 〈항백(巷伯)〉 시처럼 하면, 벼슬살이를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백성들이 조심할 줄 알게 될 것이며, 형벌을 시험하지 않고도 백성들이 모두 복종할 것이다〔好賢如緇衣, 惡惡如巷伯, 則爵不瀆而民作愿, 刑不試而民咸服〕"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 주석 5)치의(緇衣)
- 단발령을 시행하기 전에 조선 조정에서는 대신들에게 서양의 양복을 입을 것을 권고하였다. 때문에 앞에서 "치발은 뒷날에 닥쳐올 일이지만 검은 옷 복장은 이미 눈앞에 와 있다"라고 한 것이다. 이곳에서 치의는 서양의 검은색 양복을 의미한다. 오랑캐의 복장이라는 것이다.
- 주석 6)머리를 자르는 일
- 단발령은 1884년에 내려졌다. 그러나 1896년 2월에 친일내각이 물러나자 고종은 조서를 내려 '머리를 깎는 것은 각자 편한 대로 할 것이다'라는 조서를 내려 단발령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리고 1897년에 단발령은 정식으로 폐지된다. 그러나 1905년에 고종은 일본인의 위협에 각 군의 군수와 주사에게 단발할 것을 명령하였고, 1910년 한일합병 이후 단발과 편복은 전면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조치와 일본의 압박에 대하여 간재는 〈작경세문(作警世文)〉에서 단발령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단발령을 따르는 사람 중에는 무식하여 영화에 욕심이 나서 그렇게 한 사람도 있고, 절조가 없어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에 그렇게 한 사람도 있을 것이며, 가난하고 배고픔에 몰려 그렇게 한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본래의 마음을 잃어버리고서 머리를 깎으면 그 사람은 곧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고 비판한다.
- 주석 7)성탕(成湯)이 비 내리기를 기도하고
- 殷(商)왕조의 개국 군주이다. 일반적으로 탕왕(湯王)으로 불리지만, 무탕(武湯)ㆍ은탕(殷湯)ㆍ천을(天乙)ㆍ성탕(成湯)ㆍ성당(成唐)으로 불리기도 하며, 갑골문에는 성(成)ㆍ당(唐)ㆍ태을(太乙)ㆍ고조을(高祖乙)로 기재되어 있다. 탕임금이 즉위한 후 7년 뒤에 가뭄을 당해 상림(桑林)의 들에서 하늘에 기도한 것을 뜻한다. 《십팔사략(十八史略)》 권1 〈은왕성탕(殷王成湯)〉에서는 "7년 동안 큰 가뭄이 드니, 태사가 점을 쳐 '사람으로 제물을 바치고 기도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탕 임금은 '내가 기우제를 지냄은 백성을 위함인데, 만약 사람으로 제물을 삼는다면 내가 스스로 감당하리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목욕재계하고 손톱을 깎고 머리를 자르고 흰 띠풀로 몸을 묶어 자신을 희생으로 삼아, 상림의 들판에서 기도를 올리며 여섯 가지 일로 자신을 책망하기를, '정사가 절도를 잃었습니까, 백성이 직업을 잃었습니까. 궁궐이 너무 컸습니까. 여인의 청탁이 성행했습니까. 뇌물이 횡행했습니까. 참소하는 자가 많았습니까.'라고 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큰 비가 내려 수천 리를 적셨다.〔大旱七年, 太史占之曰, 當以人禱, 湯曰, 吾所爲請者民也. 若必以人禱, 吾請自當, 遂齋戒, 剪爪斷髮, 身嬰白茅, 以身爲犧牲, 禱于桑林之野, 以六事自責曰, 政不節歟, 民失職歟, 宮室崇歟, 女謁盛歟, 苞苴行歟, 讒夫昌歟, 言未已, 大雨方數千里〕"라고 하였다.
- 주석 8)태백(泰伯)이 나라를 양보한 일
- 주나라 태왕(太王)의 장자(長子)이다. 태왕이 그의 아우 계력(季歷)의 아들인 문왕(文王)에게 성덕(聖德)이 있음을 알고는 왕위를 계력에게 전하려 하자, 왕위를 아우 계력에게 양보하고서 형월(荊越)지방으로 피하여 은둔하였다. 《사기(史記)》 권31〈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서는 "고공에게는 장자가 있었으니 태백이라 하고, 둘째가 있었으니 우중이라 한다. 태강이 막내 계력을 낳았고, 계력은 태임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모두 현명한 부인이었으며, 태임은 창을 낳았는데, 성스러운 조짐이 보였다. 고공은 '나의 대에 흥할 사람이 있을 것이니 그것은 창에게 있을 것이다.'라 했다. 그러나 장자인 태백과 차자 우중은 고공이 계력을 세워 창에게 전수하려는 뜻임을 알았고, 마침내 두 사람은 형만으로 달아나서 문신을 하고 단발을 하여 계력에게 지위를 양보했다〔古公有長子曰太伯, 次曰虞仲. 太姜生少子季歷, 季歷娶太任, 皆賢婦人, 生昌, 有聖瑞. 古公曰: "我世當有興者, 其在昌乎?" 長子太伯·虞仲知古公欲立季歷以傳昌, 乃二人亡如荊蠻, 文身斷髮, 以讓季歷〕"라 하였다.
- 주석 9)맹자가……없다
- 《맹자(孟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서 "갑옷을 버리고 병기를 끌고 패주하되 혹은 백 보를 도망한 뒤에 멈추며 혹은 오십 보를 도망한 뒤에 멈추고서 자신은 오십 보를 도망갔다 하여 백 보를 도망간 자를 비웃으면 어떻습니까?〔棄甲曳兵而走, 或百步而後止, 或五十步而後止, 以五十步, 笑百步, 則何如?〕"라 하였다.
上艮齋先生 乙巳 十月
竊觀今日之勢, 履霜之氷已堅矣, 色斯之擧無及矣. 薙髮將在於後, 而黑裝卽當於前. 竊謂此二者, 若有等殺於凡夫之眼, 而實無輕重於春秋之義也. 或見人引鄭詩之緇衣謂無害於義. 若以古人之事言之, 則緇衣尙矣, 不須說, 至於斷髪, 如成湯之禱雨, 泰伯之讓國, 亦或出於不得巳之地. 今也則所以黑裝者, 不在於我之欲從古人, 而出於彼之脅從條約, 烏可援此而爲說哉? 今有兩言可以斷之者, 孔子以左袵幷稱於被髪, 則黑裝薙髮之無輕重, 已不待辨說而明矣. 孟子謂五十步無異於百步, 則雖圓袂大帶而只著一箇黑襦, 卽不免從夷亦可知矣.
〇 先生答書曰: "黑裝薙髮, 其爲夷制, 一也. 或者之分輕重非是, 而左右之不以爲然者是矣. 頃有〈從衆時中辨〉一篇, 正闢破此說, 今未暇寫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