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2년(순조 32) 11월에 전라도 금구현 유림(金溝縣儒林) 유학 장우일(張友一)·송철감(宋喆鑑) 등 17인이 전라도순찰사에게 곽영춘(郭永春)의 지극한 효성과 우애에 대해 공의(公議)를 널리 채집하여 정려(旌閭)하는 계제로 삼아 조금이라도 풍속을 교화하는 데 보탬이 되게 해 줄 것을 청원한 상서이다.
은미한 이치를 밝히고 숨겨진 미덕을 드러내는 것이 사림(士林)의 공의이다. 타고난 효성과 세상에 드문 행실이 있는데도 사라져서 일컬어지지 못한다면 포양(褒揚)의 도리에 있어 흠이 되는 일이다.
금구현에 사는 선비 곽영춘은 정의공(正懿公) 경(鏡, 1117~1179)의 후손이자 청백리 안방(安邦)의 14세손으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순수하여 고가(古家)의 기풍이 있었고, 타고난 성품이 참되고 정성스러워 효의 도를 다할 수 있었다. 그의 늙은 모친이 몇 달 동안 병을 앓았는데 온갖 약이 효험이 없어 거의 죽게 되자 손가락을 찢어서 그 피를 어머니 입에 흘려 잠깐 회생시켰다. 또 늙은 부친이 숙병으로 몇 년 동안 앓아 누워서 몸을 옆으로 돌아 눕는 데에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스스로 먹지도 못하였으나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며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잠시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밖에 봉양하는 데 술과 고기를 반드시 올려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으며, 한 번도 어버이 뜻을 거역하는 일 없이 자식의 직분을 다하였다. 또한 형제와 우애를 매우 돈독히 하여 함께 농사짓고 함께 먹어 나와 남의 구분이 없었다. 이에 그의 부모는 항상 '내 아이는 효자'라고 운운하면서 증자와 노래자에 견주어도 부끄러울 일이 없다고 하였으며, 지켜보는 사람 모두 감탄하고 듣는 사람도 모두 가상하게 여겼다.
금구현 유림들은 한 고을에서 평소 보고 감동하여 본보기로 삼는데도 포상하는 은전이 없다면 먼 지방의 궁벽한 시골에서 후인을 권면할 방도가 없을 것이라고 염려하였다. 이에 '공의를 널리 채집하여 선을 포상하고 정려하는 계제로 삼아 조금이라도 풍속을 교화하는 데 보탬이 되게 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상서를 접수한 전라도순찰사는 11월 12일에 '효행을 들으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라는 판결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