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철종 1) 3월에 동복현(同福縣) 내서면(內西面) 학당리(學堂里)에 사는 장윤문(張潤文)이
동복현감에게 서손(庶孫)에 대해 거짓으로 소송한 죄로 감옥에 갇혀있는 장유(張裕)의 소장을 관에서 불태우고, 종지(宗支)의 진위(眞僞)를 언급하여 뎨김해 줄 것을 청원한 소지이다.
장윤문의 친족 장유가 장윤문이 서손이라고 무고한 일로 소송하여 판결문을 받은 뒤 각자 근거 삼을만한 문적(文蹟)을 가지고 법정에서 대변할 때, 자료를 제출하기도 전에 먼저 말 하는 사이에 장유가 허위로 꾸민 사실이 밝혀져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장윤문은 장유의 처벌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다시 정소(呈訴)하였다. 그 이유는 장유의 완악함은 장수(杖囚)로 징계할 수 없는 점이 있고, 그가 윤리를 어지럽힌 행동이 오늘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유는 현 아산(牙山) 이 씨 수령과 온양(溫陽) 윤 씨 재임시절에 두 차례 무고(誣告)하여 패소하였다. 그러나 흉악한 마음과 망령된 계책이 갈수록 심해져 오랜 세월 뒤에 다시 소송을 일으킬 계책으로 감영과 암행어사에게 정소하여 애초 동복현감에게 뎨김이 접수되기도 전에 암암리에 권축(券軸)을 이루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 요행을 엿보고서 이런 무소(誣訴)가 있게 되었으니 지금 동복현감이 제대로 판결하지 않았다면 그의 분란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교활한 성질은 앞으로 반드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 보장할 수 없다. 장윤문이 어제 올린 소지의 뒷면에 적힌 뎨김에 '논문서를 종통(宗統)에게 내준다'는 판결은 매우 명백하지만 적서(嫡庶)의 구별이 애초 언급되어 있지 않아 훗날 근거할 만한 문적으로 쓸 수 없고, 또 장유가 앞뒤로 감영에 올린 소장이 그의 손에 있으므로 어느때고 간사한 짓을 할지 모르는 근심이 남아 있다고 여긴 장윤문은 다시 이 소지를 올려 종파와 지파의 진위를 이치를 따져 판결문을 내려주어 훗날 근거로 삼게 해주고, 장유가 거짓으로 쓴 소장은 관에서 불태워 뒷날의 폐단을 막아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소지를 접수한 동복현감은 3월 24일에 '이른바 장유가 적통이라 자칭하고 너를 지서(支庶)라고 말했다면 그가 감영과 어사에게 정소할 때에 어째서 종지(宗支)의 구별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돈 냥의 일만 말했는지, 이는 돈 냥에 군침을 흘려 서파(庶派)의 설에 다른 사람을 빠뜨리는 말에 불과하다……장유의 소지는 돈 냥 간의 일에 불과하고 애초 적서의 구별을 다투지 않았으니 반드시 소장을 불사를 필요가 없다'는 판결문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