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고종10) 12월 5일에 화순현(和順縣) 동이면(東二面)에서 강당을 열고 있는 조병만(曺秉萬)이 화순현감(和順縣監)에게 올린 첩정(牒呈)이다. 명륜당에서 강회(講會)를 연 후에 두 번의 첩(帖)이 내려와 동이면 각 마을의 강유(講儒: 유학 공부하는 유생)가 읽은 것을 모두 적어내라고 하셨기에 관첩대로 각 마을에 윤고(輪告)한 지 3~4일이 지났지만 아직 수록하지 못한 사람이 많아서 매우 황송하다는 것, 때문에 기록된 사람들만 우선 치보(馳報)한다고 하고 면(面) 사람들의 범절은 강회 때에 모두 아뢰어 조처하겠다는 뜻을 전한 내용이다. 이에 대해 화순현감은 초7일에 동이면의 강생들은 다른 면에 비해 많은데 어찌 적다고 하느냐며 13일 마곡(亍谷) 회강 때는 모두 참석하도록 하라는 제사를 내렸다.
조병만(曺秉萬, 1829~1895)의 호는 회계(晦溪),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옥천군(玉川君) 조흡(曺恰)과 화순 입향조인 조온(曺穩)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석윤(曺錫胤)이며, 아버지는 조치순(曺致淳)이다.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제자이다. 1875년(고종 12)에 흥선 대원군의 재입궐을 청하다 유배 간 사람들을 위한 전라도 상소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이로 인해 강진현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9년 동안 섬에 살면서 문하생을 교육시켰고, 유배가 풀려 돌아온 뒤에는 문하생들이 유허비를 세워주었다. 1889년경에 화순에 운곡정사(雲谷精舍)를 짓고 기거하면서 제자들과 함께 강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