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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년 이종진(李鍾震) 등 의송(議送)

기본정보
· 유형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 내용분류
· 작성주체 발급자 : 이종진(李鍾震) / 수취자 : 암행어사(暗行御史)
· 작성시기
· 작성지역
· 형태사항 크기 : 100.5 X 57.3 / 인장 : 馬牌印 3顆(원형,9.5)
· 소장처 현소장처 : (재)한국학호남진흥원 / 원소장처 : 광주 민종기
정의

갑신년 12월에 이종진(李鍾震) 등이 암행어사에게 올린 산송 의송.

해제
갑신년 12월 영암군(靈巖郡)에 사는 이종진(李鍾震)·종철(鐘轍)·종림(鍾霖)·종표(鍾表)·종수(鍾洙) 등 5명이 암행어사(暗行御史)에게 올린 의송(議送)이다.
이들이 호소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장례를 치르고, 지난 경진년에 본군 북일면(北一面) 영보서재(永保書齋) 뒷산을 매입하고자 소유자를 탐문했다. 우측 산지는 신(愼氏)와 최씨(崔氏) 두 집안이 서재를 만들어 관리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중간에 신태성(愼泰成)이 세 차례 투장(偸葬)을 하였기에 정소(呈訴)하여 파내게 하였다. 그 과정에 들어간 비용이 너무 많아 서계(書稧)는 재정이 고갈되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거기에 최치문(崔致文)이 기회를 틈타 투장하였고, 금하고 파내게 할 방법이 없어, 이 산지를 매각하여 마을의 운용에 보태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3백냥을 신씨 최씨 성을 가진 10여 명에게 주고 수표(手標)를 작성했다. 그리고 장사를 지냈고, 서재는 수리하여 묘막으로 삼아 관리하였다.
신성행(愼成行) 역시 이 수표를 작성한 10여명에 포함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향교의 임원으로 관아에 출입하는 와중에 억하심정인지 안으로는 몰래 부추기고 밖으로는 부화뇌동하면서 신태성(愼泰晠)이 관아에 무고하게 날조하였다. 이에 그동안의 내력을 보고하기 위해 처음에는 해당 동계(洞稧)에 갔고, 두 번째로 해당 면계(面稧)에 갔고, 세 번째로 향교에 갔다. 그런데 그 때에 향교 임원이 신성행과 최동윤(崔同允)이었다. 그들이 사실을 날조하여 보고했지만, 끝내는 수령께서 직접 살피고는 시비가 저절로 드러났고, 신씨와 최씨는 패소하였다.
그러나 그 둘은 무뢰배를 모아서 백주대낮에 사사로이 무덤을 파고 관을 부수고는 50여보 떨어진 묘막에 옮겨 놓았다. 이에 대해 조사한 기록은 감영에 보고한 문장 가운데 있었고, 감영의 처분에는 "시신에 변란을 일으켰느니 무거운 법률을 적용해야 한다. 다시 조사하여 처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신태성만 정배당하는 처벌을 받았고, 지시한 자는 아무일 없이 지내고 있다.
이상과 같이 상황을 성명한 이종진 등은 관련자 3인을 정배하고, 산송에 들어간 비용 등 613냥 4전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암행어사는 초2일에 "산지는 이미 매각한 사람이 무덤을 왜 파냈는가. 그리고 소위 신씨와 최씨 집안의 문장(門長)은 이미 다짐(侤音)을 납부했으면서 산송 값은 어찌 내지 않는가. 소란을 피운 3명과 다짐을 납부한 두 명은 모두 잡아 가두고, 진술서를 받아 보고할 것이다."라고 영암군 관아에 명령하는 처분을 내렸다.
원문텍스트
[미상]
靈巖郡 幼學李鐘震鐘轍鍾霖鍾表鍾洙等
右議送寃枉事 生等早喪慈母 方營永葬而 去庚辰年分 本郡北一面永保書齋 後麓請買 故問其所由 則右麓愼崔兩姓建書齋守護者 而中年分 愼泰成三次偸葬 呈訴掘移 所
費夥然 書稧蕩竭 書齋空虛 將至傾覆 而崔致文乘機偸葬 無路禁掘 則不如永賣此山 以補村用云 故折價三百兩 捧其愼崔兩姓十餘人手標後 以三百兩錢供其興成之例 而入葬
修葺書齋 仍爲墓幙守護矣 愼成行亦是十餘人中着手標者也 而渠以校任 出入衙中 抑何心腸是喩 內而暗囑 外而符同 使愚蠢之愼泰晠搆誣呈訴 則來歷馳報次 初付該洞
稧中 再付該面稧中 三付校中 而其時校任 乃是愼成行崔同允也 報辭之搆誣 不言可想 末來自官親審也 是非自在 十目難掩之致 愼崔置之落科 而▣爲暗護之致 噫 彼愼崔 率令旗吹囉打錚打
鼓 嘯聚無賴 白晝私掘 破傷棺柩 草索纏縛 移置五十餘步墓幙 世上天下 寧有如許法外之類乎 尸柩作變 昭在於摘奸記 亦在營門報辭中 而營門題內 尸柩作變 係是重律 第待更査
勘處云 而只以愼泰晠聲罪定配 指導者與尸柩作變之諸人 晏然無事 爲其人子 其可暫忘 而共戴一天乎 捧價買賣 入葬之三年後 有此私掘 破碎棺柩 以草索纏縛 移置他所 其他作
變 不見可知 是豈人之所可忍乎旀 爲人子之所可遭乎 彼輩旣已私掘 則價錢與所入之物 宜乎還給 而報償姑捨 反爲誇張 其所恃勢 於此可辨 今玆泣血仰籲于
仁明之下爲白去乎 參商敎是後 興訛造訕尸柩作變者 崔子文崔永文崔順敬等三人 輸刑遠配 以懲惡習是白遣 着手標賣地 捧價之愼崔間▣愼成行崔同允段 山價與浮費等錢 六百
十三兩四戔 已於官庭納侤是白乎則 同錢幷三年利推給 以伸切骨之寃 千萬望良只爲
行下向敎是事
繡衣閤下 處分

甲申十二月 日

山旣賣人 塚
何掘去是旀
所謂愼崔門
長 旣已納侤
則山價何不
還給是喩
作挐三人與
納侤兩漢 一

(背面)
幷捉囚 取
招報來向

初二日 靈岩官

[暗行御史] [署押]

[馬牌印] 3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