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고종 3) 4월에 담양부(潭陽府)에 사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철현이 6대조 묘소에 투장(偸葬)한 박흥준(朴興俊) 등 4인(人)을 유배하고 바로 관에서 묘를 파 옮기도록 관문(關文)을 보내줄 것을 종친부(宗親府)에 청원한 원정이다. 이철현의 육대조(六代祖)는 성종(成宗)의 넷째 아들 완원군(完原君) 이수(李𢢝, 1480∼1509)의 손자이자 순흥군(順興君)의 아들로, 묘소는 담양 고지산면(古之山面) 학동(鶴洞) 뒤 기슭에 있어 수백 년 동안 수호(守護)하였다. 그런데 근래 담양부 서리 박흥준이 묘소의 주맥(主脉) 위에, 김영운(金英運)이 지척에 놓인 계체 옆에, 최인형(崔仁炯)이 단청룡(單靑龍)에, 순창(淳昌) 사람 김재우(金在愚)가 용미(龍尾) 위에 몰래 묘를 썼다. 이에 전라감영(全羅監營)과 담양부에 정소(呈訴)하여 독굴(督掘)하라는 처분을 여러 차례 받아냈다. 그러나 그들이 바친 다짐[侤音]과 수기(手記)가 축(軸)을 이루었으나 가난하고 힘없는 후손을 멸시하여 완강히 거부하며 옮길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이철현은 종친부에 원정을 올려 전라감영과 담양부에 관문을 보내 투장한 네 놈을 형장(刑杖)으로 추문(推問)하여 귀양을 보내고, 담양 고을에서 바로 투장한 묘를 파 옮기도록 처분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원정을 접수한 종친부는 4월 15일에 '하루속히 독굴하라는 뜻으로 해당 고을에 관문을 발송할 것'이라는 처분을 내리고, 종친부 당상이 서압(署押)하고 종친부 관인(官印)을 찍었다.
이철현에 대해 『선원속보(璿源續譜)』 「완원군파(完原君派)」 권4에 '정조(正祖) 정축(丁亥)? 2월 4일생(生), 음동추(蔭同樞), 고종[當宁] 신미(辛未, 1871) 7월 29일 졸(卒), 묘(墓) 담양탄금정(潭陽彈琴亭) 축좌(丑坐) 덕행재묘갈(德行載墓碣)'이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