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년 6월 14일에 이용순(李鎔淳)이 노진영(盧軫永)에게 보낸 간찰이다. 담제(禫制) 중에 있는 상대방의 안부와 식구들의 안부를 묻고, 지난번에 지은 〈소해정(蘇海亭)〉이란 시 가운데 초연(初聯)은 바쁜 가운데 잘못 쓴 것이라서 그렇다며 '원량(元亮)' 두 글자를 '연명(淵明)'으로 고치는 것이 보기 좋을 것 같다고 하였다. 자신은 더위를 먹었는지 수마(睡魔)를 벗 삼아 지낸다고 하였다. 이용순이 지은 〈소해정〉 시는 《蘇海遺稿附錄續集》에 실려 있는데, '원량' 두 글자는 바뀌지 않고 그대로 실려 있다. 시의 전문은 "主翁亭子適成時, 三角山高必式宜. 滿庭趣癖元亮宅, 聯壁眞圖摩詰詩. 完蘇無恙安身策, 觀海爲工涉世期. 不市經綸開前業, 以淸養德恐人知."이다.
담제는 삼년상을 마친 그 다음다음 달 하순에 탈상(脫喪)하면서 지내는 제사인 담제(禫祭)를 지낼 때까지를 가리킨다. 소해정은 소해(蘇海) 노종용(盧種龍 1856~1940)이 1930년에 세웠으며 그의 아호에 따라 이름을 지은 정자다. 노종용은 원풍정(願豊亭) 건립자인 농암(聾岩) 노재규(盧在奎 1836~1920)의 아들로서, 그의 선조인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행적을 본받아 은둔소요(隱遁逍遙) 하였다. 노종용은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등 한말 우국지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송병선이 자결하고 최익현이 일제에 잡혀 대마도에서 순절하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광주 일곡동에 내려와 도의의 교를 맺어 학문을 논하고 전념하며 후진양성에 힘쓴 인물이고, 《소해유고(蘇海遺稿)》'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