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년 11월에 곡성현(谷城縣) 예산면(曳山面)에 사는 서영수가 암행어사에게 향리(鄕吏)와 군관(軍校)의 간교로 까닭 없이 고마청(雇馬廳)에 속공(屬公)된 자신의 산지(山地)를 되찾아주고 완문(完文)을 내줄 것을 청원한 의송이다. 이 문서는 서영수가 동년 6월에 도순찰사와 곡성현 겸관 등에게 세 차례에 걸쳐 청원하였으나 처분대로 시행되지 않자 다시 사건의 경위와 정소하여 받은 처분의 내용 및 향리와 군관의 간교한 짓을 호소하며 암행어사에게 청원한 것이다. 청원한 사건의 경위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산면 연안 십여 리에 있는 나뭇갓[柴塲] 일대는 임자년부터 이곳을 순찰하고 힘을 모아 수호하면서 해마다 땔나무를 내다 팔아서 민역(民役)에 보충해서 쓰고 남은 돈으로는 전답 몇 섬지기를 사두었다. 그런데 지난겨울에 간교한 향리 정인국(鄭仁國)·장계우(張啓宇)와 군교 여선묵(吕善黙)이 서영수 등 나뭇갓의 여러 유사(有司)를 관에 고하여 나뭇갓과 전답을 모두 빼앗아 고마청에 속공하고, 유향소(留鄕所)의 고소로 상유사(上有司)인 조윤명(趙允命)과 유방진(柳邦鎭)은 죄를 판결한 후 석방했으며, 김필옥(金弼玉)과 김유옥(金裕玉)은 가난하다고 해서 풀려났다. 하지만 서영수는 요명(饒名)이라 칭하여 갖가지로 위협하며 빙정조(氷丁租) 60섬과 진상에 쓰는 장빙(蔵氷) 값 120냥을 이유 없이 부담하게 하고 또 속전(贖錢) 60냥을 공연히 책납(責納)하게 하였다. 하지만 가장 원통한 것은 서영수의 선영(先塋)이 순산(巡山) 안에 있어 용호육곡(龍虎六谷) 약간의 송추(松楸)가 심어진 곳을 값으로 논 일곱 말과 30냥을 면(面)에 납부하고 명문을 작성하여 사들인 후 금양(禁養)하였는데, 남은 돈으로 사 둔 위 전답 몇 섬지기가 고마청에 속공될 때 이 송추지(松楸地)까지 속공에 섞여서 귀속된 것이다. 이에 여러 차례 청원하였으나 오랫동안 결정되지 않다가 전임 수령이 돌아갈 때 다시 소지를 올려 비로소 서영수의 뜻대로 제사(題辭)를 받았는데 소지가 갑자기 사라져 한창 찾고 있을 때 좌수(座首) 정인국이 서영수에게 자신이 힘쓰겠다며 70냥을 바로 상납하면 소지를 내주겠다고 하기에 백성을 좀먹는 해독을 꾸짖은 후 버려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밤에 병방군관(兵房軍官) 여선묵이 관령(官令)을 칭탁하여 사사로이 서영수를 잡아가 소지를 내보이면서 '소지는 내 손에 있으니 30냥을 빨리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이에 서영수가 웃으며 '소지의 제사가 어찌 값이 있느냐, 나는 3냥이라도 줄 이유가 없다'고 꾸짖었다. 이후 감영에 청원하여 '내역을 자세히 조사하고, 본 문권(명문)을 상고하여 찾아내 줄 수 있는 것은 찾아내 주고 징급(徵給)할 것은 징급하라'는 처분을 받았으며, 관에 정소(呈訴)하여 '사실을 자세히 상고하라'는 등 모두 세 차례 정소하여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간교한 향리와 군교가 서영수의 산지를 빼앗고 땔감을 판 165냥 중 60냥을 모두 사사로이 사용하였다. 서영수는 자신이 값을 지불하고 산 송추지가 속공될 까닭이 없다면서 그 억울함을 호소하고, 산지 완문 출급의 처분을 내려주고 산지를 되찾아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의송에 대해 암행어사가 처분한 제사 일부가 남아있으나 그 정확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문서의 제사에 관인(官印)을 대신한 암행어사의 마패가 찍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