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壬午) 3월에 자운산인(紫雲山人) 김정회가 신현중의 호 율봉(栗峯)의 의미를 새긴 글이다.
'도연명(陶淵明)이 살던 율리(栗里)는 너무 멀지만 맑은 바람은 여전히 전해져서, 그 풍모를 듣고 흥기한 사람이 율봉(栗峯) 신현중(申鉉中) 공이다. 신 공은 그 뜻을 사모하다 못해 호를 율봉으로 지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사방(四方)에 뜻을 듯고 국내의 호걸지사를 만나며 문장을 닦아, 그 의기(義氣)는 나라를 지탱할만 했으나, 시대와 어긋났다. 이미 혼탁한 세상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자, 돌아가 은거하며 스스로를 태고적 희황사인(羲皇上人)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도연명의 풍모를 듣고 신 공이 그러한 것처럼, 신 공의 얘기를 듣고 또 흥기되는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가난함을 슬퍼하지 않고, 부귀에 급급하지 않는다."는 도연명의 글로 율봉기를 마무리했다.
김정회(1903~1970)는 고창출신 유학자이자 서화가이다. 1934년 고향집 만수당(晩睡堂)에서 도산보통학교를 개교하였고, 다음해인 1935년 아버지가 희사한 대지에 새로 학교를 지어 그 곳으로 옮겼다. 1941년 39세 때 경학원 강사로 선임되었다. 1945년 일제가 물러나고 광복이 되자 서울로 올라왔으나 혼란한 정치상을 보고 다시 귀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