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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김정회(金正會) 율봉기(栗峯記)

기본정보
· 유형분류 고문서-시문류-기
· 내용분류 교육/문화-문학/저술-기
· 작성주체 발급자 : 김정회(金正會)
· 작성시기 壬午 (1942)
· 작성지역
· 형태사항 크기 : 77.0 X 21.4
· 소장처 현소장처 : 신영남 후손가 / 원소장처 : 고창 평산신씨 신영남 후손가
· 참고문헌
  • 정의

    1942년 3월에 김정회가 신현중의 호 율봉의 뜻을 적은 글

    해제
    1942년(壬午) 3월에 자운산인(紫雲山人) 김정회가 신현중의 호 율봉(栗峯)의 의미를 새긴 글이다.
    '도연명(陶淵明)이 살던 율리(栗里)는 너무 멀지만 맑은 바람은 여전히 전해져서, 그 풍모를 듣고 흥기한 사람이 율봉(栗峯) 신현중(申鉉中) 공이다. 신 공은 그 뜻을 사모하다 못해 호를 율봉으로 지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사방(四方)에 뜻을 듯고 국내의 호걸지사를 만나며 문장을 닦아, 그 의기(義氣)는 나라를 지탱할만 했으나, 시대와 어긋났다. 이미 혼탁한 세상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자, 돌아가 은거하며 스스로를 태고적 희황사인(羲皇上人)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도연명의 풍모를 듣고 신 공이 그러한 것처럼, 신 공의 얘기를 듣고 또 흥기되는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가난함을 슬퍼하지 않고, 부귀에 급급하지 않는다."는 도연명의 글로 율봉기를 마무리했다.
    김정회(1903~1970)는 고창출신 유학자이자 서화가이다. 1934년 고향집 만수당(晩睡堂)에서 도산보통학교를 개교하였고, 다음해인 1935년 아버지가 희사한 대지에 새로 학교를 지어 그 곳으로 옮겼다. 1941년 39세 때 경학원 강사로 선임되었다. 1945년 일제가 물러나고 광복이 되자 서울로 올라왔으나 혼란한 정치상을 보고 다시 귀향하였다.
    원문텍스트
    [미상]
    栗峯記
    滿天下 桃紅 李白朱門畵閣
    衛雨鄭雲朝晝莫辨 安
    得如栗里一陣淸風 掃除氛
    祲 開靑天而覩白日耶 噫栗
    里旣遠 淸風猶傳 聞其風
    而興者 其惟栗峯 申公乎
    興其風而慕其義 慕之不
    足而號之 第味知公之峯
    之栗 與淵明所居之 實同不
    同如何 而名同則義同 義同
    則其人亦無不同 公早有四方
    之志 所與遊 皆海內豪傑之
    士 盖其文藻 足以擬華國之
    業 其氣義 足以任干城之責
    而世與我違 旣不得使濁世
    激淸 則歸臥悲意風 自謂
    羲皇上人 又味知聞公之風而
    與者有如公之於陶也歟 五柳
    先生自讚曰 不戚之於貧賤
    不汲汲於富貴 吾亦爲公一

    歲壬午春三月戊申
    紫雲山人 金正會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