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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안군(扶安郡) 김방제(金邦濟) 등 산지입안(山地立案)
부안군(扶安郡) 김방제(金邦濟) 등 산지입안(山地立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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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군(扶安郡) 하동면(下東面) 석동산(席洞山)에 대한 1860년(철종 11) 12월 전라감사의 입안(立案)과 1860년(철종 11) 12월 24일에 전라감사가 부안김씨 김방제(金邦濟) 등에게 발급한 완문(完文), 김방제 등의 변무원정(卞誣原情)으로 이루어진 산송문서(山訟文書)이다.1860년(철종 11) 12월 전라감사(全羅監司)의 입안(立案)은 부안군 하동면 석동산에 있는 김방제 등 부안김씨의 산지에 대한 것이다. 그 내용은 "부안현 김방제는 소윤(少尹)의 본손인데 소윤묘가 있는 산지를 외손인 최가에게 빼앗기고 한성부(漢城府)와 전라감영에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최씨가 석동산에 차장(借葬)한 것은 원래 2총이었는데 후손을 대대로 장사를 지내더니 심지어 소윤(少尹)의 묘 아래까지 압장(壓葬)하였다. 최씨의 외선산(外先山) 늑탈은 풍속을 경계하는 측면에서 그대로 둘 수 없으니, 4명의 최씨들을 엄하게 처벌하고, 소윤의 묘문(墓門)을 개척(開拓)하며, 산지는 정계를 정하고, 소나무도 함께 본래의 주인(主人)인 김민(金民)에게 주어 영원히 수호하게 한다. 이 송사는 경영(京營)의 관문(關文)과 감결이 있고 제교(題敎)가 있으며, 일의 전말과 산의 형편에 관해서는 원보(原報)에 있으니 뒷날에 상고하기 위해 아래에 열거한다. 지금 이후로 최씨는 무덤만 그들의 것이니 사표(四標) 내의 풀 한 포기 나무 하나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으로 입안을 만들어 준다."라고 하였다.입안 아래에는 원보초(原報草)라 하여 부안현감의 첩보(牒報)가 첨부되어 있다. 부안현감은 먼저 김방제의 소장을 요약한 뒤 산지를 친심(親審)한 결과를 보고하고, 감영에서 입안(立案)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첩보하였다. 김방제 소장 내용은, "석동산은 김방제의 13세조 소윤공 김세영(金世英)과 그의 동생 군사공(郡事公) 김광서(金光敍)가 먼저 터를 잡았고, 좌우에 묘가 있어 대대로 수호하였다. 그러다 소윤의 손서인 최생명(崔生明)과 현손서인 최계성(崔繼成)을 소윤공과 군사공의 무덤이 있는 곳에 차장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중간에 소윤공의 자손이 미약하고 흩어져 살게 되자 최씨들이 소윤공의 묘 전록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1848년(헌종 14)에 최진하(崔鎭夏) 등이 소윤공의 묘문을 쪼아내고 용미에 길을 내었으므로 정소(呈訴)하였더니, 당시의 송관(訟官)이 최씨측을 두둔하고, 최씨들이 외가에서 분급 받았다고 억지를 부려 소윤공의 묘를 주인 없는 무덤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부안현감은 한성부와 전라감영의 지시에 따라 김씨와 최씨를 산 아래에 대령하여 친심(親審)한 결과를 보고하였다. "소윤묘 전후좌우에 나무가 빽빽하고, 최씨들은 소윤공의 묘 조금 먼 곳에 최생명의 무덤이 있는데도 여기는 놔두고 소윤공묘의 용미와 섬돌 밑에 7총을 압장하였다."고 하였다. 압장한 7총은 최민에게 분부하여 즉시 파내도록 하고, 사표(四標)를 정하고, 아울러 소나무도 김씨측에 추급하도록 입안을 만들어 주어야 하며, 외선산을 늑탈하려고 도모한 최겸석(崔謙錫) 등은 법률에 따라 처분을 내려야 한다고 첩보하였다.부안현감의 첩보 뒤에는 1860년(철종 11) 12월 18일의 전라감사의 제사(題辭)와 1860년(철종 11) 12월 12일의 부안현감의 제사, 1860년(철종 11) 12월 20일의 부안현감의 결안제교(決案題敎)가 기록되어 있으며, 1860년(철종 11) 12월 24일에 전라감사(全羅監司)가 부안김씨 김방제(金邦濟) 등에게 발급한 완문(完文)이 기록되어 있다.전라감사의 완문 내용은, "부안 석동산에 있는 김방제(金邦濟)의 선조 소윤공의 묘 한 켠을 외손(전주최씨)의 차장을 허락하였는데 그 외손의 손자인 최진하(崔鎭夏)・최광벽(崔光璧)・최익경(崔益坰) 등이 계장(繼葬)을 하고, 위조문권을 만들어 소윤공묘가 있는 산 전국(全局)과 송추(松楸)를 빼앗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김방제 등 부안김씨들은 산지와 송추를 다시 찾아 줄 것을 한성부(漢城府)에 탄원하였고, 한성부(漢城府)에서는 부안현으로 관문에 보내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조사 결과 전주최씨들이 은혜를 저버리고 산지를 늑탈하려 한 일이 탄로 났다. 지금부터 최익경 등은 사표 내를 다시는 침범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 완문을 만들어 준다."고 하였다. 김방제 등 부안김씨에게 부안(扶安) 석동산(席洞山)의 점유를 인정해 준 것이다. '완문(完文)'은 어떤 사안에 대해 조사 후 관청의 재량에 따른 처분을 담은 문서이고, '입안(立安)'은 어떤 일에 대해 공증을 해주는 문서이다.전라감사의 완문 뒤에는 김방제(金邦濟)・김성풍(金性豊)・김정규(金鼎奎)・김상익(金相翼) 등의 변무원정(卞誣原情)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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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下東面席洞山金邦濟等山地立案
咸豊十年庚申十二月 日 下東面席洞山金邦濟等山地立案
右立案爲永久遵行事凡訟係寃屈則終有必伸之日事固理直
則乃有歸正之時是如乎本縣民金邦濟等卽少尹本孫也少尹墓山
地松楸見奪於外孫崔家爲其本孫者爲先之心切骨之寃去益深矣
乃於千里裹足鳴寃於京兆旣有關文訴寃於 營門至承 甘飭幷
其狀題而到付故曰金曰崔幷待山下親審形便則盖此山在縣南
五里許名以席洞界限自在松楸蓊蔚而當初崔家之借葬於此
山者不過二塚而已其後崔之子孫世世入葬自下至上殆無閒土
甚至於少尹墓龍尾上壓葬者爲六塚階砌下逼葬者爲一塚
以其外孫是加忍乎今於親審之場端緖畢露曲直立判崔民
之勒奪外先山期欲凐滅前後所爲節節可駭其在警俗不
可仍置同崔家四民等一倂嚴勘而少尹墓門卽日開拓山地四
標尺量自少尹墓東至畓頭爲九十四尺西至畓頭爲一百二
十尺南至畓頭爲一百九十三尺北至峯頭爲二百三十尺幷與其
松楸而推給本主金民永爲守護是在果夫此訟旣有京營關
甘又有議狀 題敎寃已得伸事仍歸正而本事之顚末京營關
甘山處形便備載於原報中不必疊床故同原報草謄列于左
以備後考從今以往崔民段只塚其塚而已此山四標內雖一草一
木更無得侵犯之意成立案以給爲去乎依此永久遵行爲宜
者
此亦中一件邑上一件出給金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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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報草
爲牒報事卽到 使甘結內粘連漢城府關辭及狀題相考
勒奪禁養之崔民一倂嚴勘松楸與山地卽地推給形止報來
宜當者 甘結敎是乎旀粘連漢城府關內卽接道內扶安縣
幼學金邦濟等所訴則假葬於外先山者恩猶感戴而倒戈
反嚙期使外先墓凌夷倡造僞券使人眩惑者罪固罔赦而其
時訟官旣已勘處則姑置毋論爲遣且渠衿給之說尤爲乖
戾矣田宅奴婢何所不可而豈以先山墳墓於給於外裔自歸於
無主之塚者是可近理之說乎崔民之奸計綻露無餘果是無
論無法則罪亦不可容貸一倂嚴勘是遣山地及松楸卽地推給
永使金民守護無至呼寃爲旀且其墳傍連抱之木圍逼擁蔽
聞極駭悖在渠崔民亦是少尹外孫則忍爲肆毒於外先墓乎前
後罪狀節節痛惡而況又漢城少尹旣是宰列之墓則 朝家亦
爲守護之典載在而今其蔭木所翳莎草不附者尤極矜憐玆
以發關爲去乎到卽嚴飭該邑不日內斫伐墳傍蔽木遂開墓
門以示 朝典爲遣形止卽爲報來宜當向事 敎是乎旀本縣金
邦濟等呈議送 題敎內旣有京兆完文狀辭又如此査實後無
至更侵宜當向事山在官是齊原狀內節該矣等十三世祖少尹公
諱世英弟郡事公諱光敍大歸本縣時先占壽藏之地於本縣
席洞山而少尹公墓在於右岡郡事公墓在於左麓子孫世居世守
而世葬焉一洞之地一草一木莫非矣等之禁養矣其後崔益坰
先祖生明爲郡事公孫婿而生明之孫繼成爲少尹公之玄孫婿矣
生明繼成之死借葬於少尹公郡事公墓所兩麓之間而只借一壙
之至則局內禁養崔家初不干涉只護其兩塚而已矣中年以
來少尹公子孫微弱散居各處崔後裔世居山下鱗次繼葬遂奪
一麓幷取松楸而壑慾漸長將欲奪少尹公之墓麓全局往在
再在去戊申崔鎭夏崔光璧等暗生凌夷少尹公墳墓之計斲刓碑
文開經於龍尾渠亦少尹公之外孫則血脈遺傳而乃敢造凶是加忍
爲乎其時訟官蔽於崔家之構誣竟不歸正故矣等之祖以其時門
長不勝痛寃將欲擊錚沒於中路矣等之極痛益切末來則諸
崔臆說此山麓衿得於外家云然田宅奴婢或有於衿給之例而以
山麓衿給於外孫古所未聞者也自此以後崔之凶計愈往愈甚
少尹公墓麓全局永爲奪取使此微弱之本孫不得禁代墳上前
後左右松楸蔭翳土皮盡脫殆同無主之塚苟究崔家所爲天理
人情到此掃盡矣具由粘連仰訴行 關該邑同崔益坰崔煥國
等悖理滅倫之罪別般嚴繩是遣右山全局卽爲推給於本孫俾
雪幽明之寃事原狀 題敎及 甘結粘關是置有亦京營關甘
若是申嚴山處形便必當先審故金崔兩民使之待令於山下縣
監卽爲馳往詳細摘奸是乎則少尹墓前後左右連抱之木密密圍
立體碑銘碣巋然相對以若宰列之墓尙未開拓實爲寒心盖此
山名曰席洞在縣南五里許有起峯峯之南稍平處有東西兩麓中
有一巷分水西麓卽少尹墓也東麓卽少尹弟郡事墓也少尹墓麓
東邊相連處有一平岡形如幅之長同岡下邊有少尹從孫婿玄
孫婿兩崔塚自少尹墳傍俯視則皆在階外稍遠之地果以外孫有
此許葬是加隱喩當初崔家之始葬於此者卽此二塚也其
後崔之子孫世世倒葬上至峯下殆無閒土甚至於少尹墓
龍尾上壓葬者爲亦塚階砌下逼葬者爲一塚密探輿
論參以躬審端緖已露曲直立判是如乎崔民之爲
金家外孫渠亦不諱席洞之爲金家先山人皆質言當初
借葬女婿寔出舐犢之愛末內見奪山地反爲養虎之
患夫崔家本以來贅之蹤借得葬骨之地事固感戴
恩猶難忘是去乙不思報德之義反生嚙趾之心暗釀
蠶食之謀乃有鵲巢之奪而況又旣奪之後稱以渠之禁
養無難壓葬不拓墓門致使百年宰列之墓使作一坏
無主之塚夫何肆毒至此可謂其疾甚矣大抵人皆有外
祖外孫則噫彼崔家之金氏祖母魂若有知其可曰余有
孫乎以情以法崔民所爲節節可駭情跡旣露所當
幷與借葬塚而一時掘移是乎矣事在年久恐合參
恕而至若少尹墓龍尾上及階砌下追後逼葬之崔
民七塚係是當掘故卽爲掘去之意分付於崔民
爲乎旀山地四標尺量自少尹墓東至畓頭爲九十尺西至畓頭
爲一百二十尺南至畓頭爲一百九十三尺北至峯頭爲二百三十尺
幷與其松楸而推給本主金民自本縣仍成立案以給爲乎旀墓
門爲先卽日開拓同崔謙錫崔煥國崔鳳坰崔鳳煥等依
甘辭嚴勘後仍爲牢囚而崔益坰段姓名旣載於議狀固當一
例奉行是乎矣渠旣今前出他故姑不得嚴勘是乎乙在果
勒奪外先山期欲湮滅前後駭悖旣至此極其在警俗決不可
仍置上項崔民等依律勘處同壓逼塚卽令掘移事竝只
處分行下敎是乎旀山體圖畵粘上以備便覽原關還上使緣
由幷以牒報爲臥乎事
報 巡營
營題
卽見報辭崔民之前後所爲極甚駭悖山地旣已推給
崔塚中年久者不必擧論是遣見囚諸崔倂懲礪放送向事
庚申十二月十八日
本官題敎
稱曰外孫能以外先祖墓理不當而天理滅矣査實決處次
崔門中知事人與狀內所訴諸人待令於山下更爲來訴向事
庚申十二月十二日
本官決案題敎
稱以外孫借葬於外先祖局內於崔可謂難忘之恩是去乙
渠等孤負外氏家厚義亦不念人倫之所關壑慾廣售於松
楸奸狀於漸大於沮戱使本孫不得守護全山禁養奪付渠之
局內非但汝矣之寃抑亦是一邑之所共忿矣今因京兆與
巡營門甘飭之截嚴親審之日一一推給於本孫日後崔門
中營邑間更有起鬧此題與立案憑考是遣立案段二件成
出一則爲邑件一則出給汝矣身而壓逼七崔塚非不欲掘給
是矣事係營門不可擅施向事 庚申十二月二十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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巡營門完文
扶安金邦濟等山地完文
爲完文成給事扶安金邦濟等先祖少尹公山所在於席洞山而其後
孫許葬其外孫於禁養內是加喩其外孫之孫崔鎭夏崔光璧
崔益坰等前後相繼暗釀凶計僞造文券勒奪少尹公墓
全麓仍作渠之禁養同山地與松楸推給事漢城府飭關山
在官査報崔民之背恩圖占非理勒奪綻露無餘自歸落
科自今以後使崔益坰等四標內更無敢侵犯事完文成給爲
去乎永久遵行宜當向事
此亦中山在官段完文內辭緣相考施行次
庚申十二月 日
兼使[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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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申十二月 日 金邦濟等山地完文
卽到付 巡營門成給完文內扶安金邦濟等先祖少尹公山所在
於席洞山而其後孫許葬其外孫於禁養內是加喩其外孫之
孫崔鎭夏崔光璧崔益坰等前後相繼暗釀凶計僞造文
券勒奪少尹公墓全麓仍作渠之禁養同山地與松楸推
給事漢城府飭關山在官査報崔民之背恩圖占非理勒奪
綻露無餘自歸落科自今以後使崔益坰等四標內更無敢侵
犯事完文成給爲去乎永久遵行宜當向事此亦中山在官段完文
內辭緣相考施行亦爲有置前因京營關甘墳傍及墓門卽爲
開拓山地與松楸追給金民四標尺量自本孫案成給後形止
亦夷修報矣今到營完文又如是截嚴故枚擧辭緣本邑完
文更爲成給爲去乎自今以後崔民則塚其塚而已後錄四標
內雖一草一木更無敢侵犯事依營邑完文立案永久施行宜
當者
此亦中完文二件成出一件邑上一件出給金家
官[署押]
後錄四標
自少尹墓東至畓頭爲九十尺
西至畓頭爲一百二十尺
南至畓頭爲一百九十三尺
北至峯頭爲二百三十尺
卞誣原情 幼學金邦濟金性豊金鼎奎金相翼等
[以下省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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