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6월 10일에 전남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운곡리(雲谷里)에 사는 이교천(李敎川), 이정순(李正淳), 이용순(李龍淳) 공동 명의로 경남 창원군 북면(北面) 고암리(高岩里)에 사는 이백영(李百榮)에게 보낸 간찰이다. 피봉이 있다. 형재(亨齋) 선생의 묘표(墓表)를 새로 만드는 일은 실로 수백 년 동안 행하지 못했던 성대한 일인데 여러 종씨(宗氏)가 유독 힘써 노력함에 지극히 흠탄(歆歎)하며, 자손 중에 누구인들 우러러 사모하여 정성을 다하지 않겠는가마는 그중 한둘은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은 이러한 일을 스스로 헤아릴 수 없어 교성(敎成)에게 전송하였다. 여러 종중에서 합의(合議)하여 자손들이 한없이 봉양하게 해야 한다. 자신들의 성품은 고아하고 반듯하여 조금이라도 깨끗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더럽혀질 것처럼 여겼기 때문에 남과 부합되는 일이 적었다. 의론한 것이 어긋나는 일이 반을 넘지 않으나 준공(竣功)에 이르러 결함이 아닌 결함과 결함이 있는 결함을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이번 우천 관계로 도로가 위험하고 끊어져 소식이 이와 같이 지체하게 되었으며, 문중에 안배하여 부칠 것이니 받는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상세하게 회답해 달라고 하였다. 교천과 정순은 이름 아래에 날인하였다. 형재 선생은 성주이씨 이조년의 증손자 이직(李稷, 1362~1431)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