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음력 4월 17일, 족질(族侄) 남수(南洙)가 전남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에 사는 이교성(李敎成)씨에게 혼처를 주선하며 이달 말 이내로 신랑을 만나 줄 것을 청하는 내용으로 보낸 편지이다.
지난달에 이별했던 것이 아직 꿈같다며 최근 푸른 나뭇잎이 그늘을 만드는 요즈음에 어른 모시고 계신 형제분들의 안부를 물었다. 조카인 자신은 상중에 겨우 생활을 보존하고 있다고 인사한 후 전에 부탁했던 혼인에 관한 일에 대해 언급했다. 개평(介坪) 승지(承旨) 정승현(鄭承鉉)씨가 혼인을 저울질하는데, 나이 16세이고 피차 적당하기에 속히 통기하니 편지를 보는 대로 다음날에 자신의 집으로 왕림하여서 서로 상의하시는 것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신랑 될 사람이 위양(渭陽)과 남원(南原)의 윤(尹) 모(某) 가(家)라고 하니 족숙께서 연원을 참고하면 조금이라도 보탬이 있을 것이라며 이달 말 내로 좌우간에 신랑을 만나보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묻고 편지를 마쳤다. 추기(追記)에는 만약 연기를 한다면 이곳에서는 절망할 것이니 기한 내로 왕림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