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고종 12) 10월에 부안현(扶安縣)의 화민(化民) 이규현(李奎炫), 이홍선(李洪善), 이창선(李昌善) 등 전주이씨(全州李氏) 일족이 함양군수(咸陽郡守)에게 올린 단자(單子)이다. 이들은 단자에서 자신들의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으로 함양군(咸陽郡) 백전리(栢田里) 대방촌(大方村) 후록(後麓)에 선산(先山)이 있으며, 수백년 동안 금양(禁養)해 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난 신축년, 즉 1841년(헌종 7)에 대방촌에 사는 도백언(都百彦)이란 자가 선산의 단청룡(單靑龍)에서 20보가 채 안되는 곳에 투장(偸葬)을 한 일이 있어서, 이씨 문중은 관에 소지를 올려 즉시 무덤을 파가게 하였다. 그 뒤 계유년, 즉 1873년(고종 10) 11월에 교촌(校村)에 사는 권병택(權秉澤)이란 자가 바로 앞서 무덤을 파낸 그 자리에 자기 부친의 묘를 몰래 썼다. 이씨 문중에서는 권병택에게 달려가 무덤을 파가라고 밤낮으로 요구했다. 권병택은 겨울에 일을 처리하기가 어려우니 나중에 산을 구한 다음에 이장하겠다고 애원하면서 여러 차례 수기(手記)를 작성하며 다짐을 했다. 그러나 권병택은 여러 차례 약속을 어기며 이장을 하지 않았다. 이에 이씨측은 부안현에 소지를 올려 권병택을 관아에 잡아다가 엄히 다스리고 즉시 무덤을 파가게 해달라고 탄원하였다. 그러면서 권병택이 작성한 수기 2장을 점련하여 소지와 함께 관아에 제출하였다. 관에서는 권병택을 데려오면 대질하겠다는 답변을 내렸다. 이 때 이씨측이 올린 권병택의 수기는 "1874년 권병택(權秉澤) 수표(手標) 1"과 "1874년 권병택(權秉澤) 수표(手標) 2"로 현전하고 있다.
이 단자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가 다수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을해년으로만 나오지만, 권병택의 수기 등 관련문서를 통하여 을해년을 1875년으로 추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