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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부안현(扶安縣) 화민(化民) 이규현(李奎炫) 등 단자(單子)

기본정보
· 유형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 내용분류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 작성주체 발급자 : 이규현 이홍선 이창선 등 / 수취자 : 함양군수
· 작성시기 乙亥十月 日 (1875)
· 작성지역 경남 함양군
· 형태사항 크기 : 64.3 X 42.3 / 서명 : [署押] 1개, [官印] 1개 / 인장 : 7.0*7.0 1개(적색, 정방형)
· 소장처 현소장처 :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 원소장처 :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정의

1875년(고종 12) 10월에 부안현(扶安縣)의 화민(化民) 이규현(李奎炫) 등이 함양군수(咸陽郡守)에게 올린 단자(單子).

해제
1875년(고종 12) 10월에 부안현(扶安縣)의 화민(化民) 이규현(李奎炫), 이홍선(李洪善), 이창선(李昌善) 등 전주이씨(全州李氏) 일족이 함양군수(咸陽郡守)에게 올린 단자(單子)이다. 이들은 단자에서 자신들의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으로 함양군(咸陽郡) 백전리(栢田里) 대방촌(大方村) 후록(後麓)에 선산(先山)이 있으며, 수백년 동안 금양(禁養)해 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난 신축년, 즉 1841년(헌종 7)대방촌에 사는 도백언(都百彦)이란 자가 선산의 단청룡(單靑龍)에서 20보가 채 안되는 곳에 투장(偸葬)을 한 일이 있어서, 이씨 문중은 관에 소지를 올려 즉시 무덤을 파가게 하였다. 그 뒤 계유년, 즉 1873년(고종 10) 11월에 교촌(校村)에 사는 권병택(權秉澤)이란 자가 바로 앞서 무덤을 파낸 그 자리에 자기 부친의 묘를 몰래 썼다. 이씨 문중에서는 권병택에게 달려가 무덤을 파가라고 밤낮으로 요구했다. 권병택은 겨울에 일을 처리하기가 어려우니 나중에 산을 구한 다음에 이장하겠다고 애원하면서 여러 차례 수기(手記)를 작성하며 다짐을 했다. 그러나 권병택은 여러 차례 약속을 어기며 이장을 하지 않았다. 이에 이씨측은 부안현에 소지를 올려 권병택을 관아에 잡아다가 엄히 다스리고 즉시 무덤을 파가게 해달라고 탄원하였다. 그러면서 권병택이 작성한 수기 2장을 점련하여 소지와 함께 관아에 제출하였다. 관에서는 권병택을 데려오면 대질하겠다는 답변을 내렸다. 이 때 이씨측이 올린 권병택의 수기는 "1874년 권병택(權秉澤) 수표(手標) 1"과 "1874년 권병택(權秉澤) 수표(手標) 2"로 현전하고 있다.
이 단자가 소장된 부안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가 다수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을해년으로만 나오지만, 권병택의 수기 등 관련문서를 통하여 을해년1875년으로 추정하였다.
원문텍스트
[미상]
單子 全羅道扶安縣化民李奎炫李洪善李昌善

鑑伏以民等之十四代祖讓寧大君也十三代順城君也十二代祖烏川君也十一代祖任城守也十代祖成均進士公也九代祖成均進士公也八代祖洗馬公也
七代祖叅奉公也而墓所在於果川而民之六代祖監役公始寓于治下上栢田里而仍葬于本里大方村後亥坐之原矣而累百年以來守護禁
養矣去辛丑年分本里居都百彦爲名人偸葬於單靑龍二十步內故呈于本 官卽爲掘去矣去癸酉十一月今校村權秉澤爲名人肆然
偸葬其父於已掘之地故民等卽地來到將以掘移之言晝夜語之則同權秉澤言內當此冬節甚難周旋而求山後移埋之意累累哀乞數次手標
故民等信之無疑而今秋來到則同秉澤終不掘去而又爲容舒云世豈有如許無法不俶之心雖尋常凡夫之塚不可如是慢侮偸葬况於士夫
家有官爵之墳墓四山內已掘之處乎噫彼秉澤世居校村素多邑權自恃豪悍蔑視容踪故民等不勝憤寃玆敢 仰籲於 明政之下伏乞
城主閤下特垂矜憐之澤同秉澤捉致法庭卽地掘去以保他鄕殘民之先壟之地千萬泣祝
行下 向敎 是事
城主 前 處分

乙亥十月 日單子

權秉澤手記二張接聯

慶尙道發[署押]

(題辭)
率來對卞向

十九日
狀民
[官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