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고종 27) 3월 17일 이주봉(李周鳳)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거석리(擧石里)에 있는 초가(草家)와 전답(田畓)을 팔면서 작성한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이다. 가대와 밭의 주인 이주봉은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물려받아 여러 해 동안 살아오던 초가(草家)를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가대와 전답이다. 부안현 상서면 거석리에 있는 초가 4칸과 행랑(行廊) 2칸, 그리고 밭 2두락지(斗落只)와 저전(苧田) 9두락지이다. 이와 함께 태종전(太宗田) 18두락지, 면전(綿田) 4두락지, 옥답(沃畓) 3두락지, 시장(柴場) 50동(同), 배나무 1주(株), 감나무 6주(株)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모두 250냥이다. 거석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이주봉은 신구문기(新舊文記) 3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가대주(家垈主) 동몽(童蒙) 이주봉은 상중(喪中)이어서 서명을 하지 않았다. 증인(證人)은 강영기(姜永氣), 증필(證筆)은 이영의(李瑛儀)가 참여하여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