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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산송문서철(山訟文書綴) 2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산송문서철(山訟文書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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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扶安) 전주최씨(全州崔氏) 산송문서철(山訟文書綴)로 17종의 증거 서류들이 있다. 같은 내용의 문서 2묶음이 합철된 것으로 첫 번째 문서 묶음에는, 회사관(會査官)의 발사(跋辭), 경조관문(京兆關文), 1872년(고종 9) 8월 부안현감 서목(書目), 1873년(고종 10) 2월 4일 전라관찰사의 감결(甘結), 1873년 부안현감의 첩보(牒報), 1872년 2월 부안현감 서목과 전라관찰사의 제사, 1865년(고종 2)전라관찰사의 완문(完文), 1898년(고종 35) 재판소 판사 이완용(李完用)의 판결서(判決書), 1898년 김주상의 다짐, 1898년 부안현감의 고시(告示), 1910년 농상공부산림국(農商工部山林局)의 석동산(席洞山)에 대한 지적계증명서(地籍屆証明書), 1921년 3월 부안군수(扶安郡守)의 벌채 허가서, 1921년 10월 부안군수의 벌채 허가서, 1923년 부령면장(扶寧面長)의 동일산명증명서(同一山名証明書), 부안김씨세보권지일(扶安金氏世譜卷之一) 등이 순서대로 묶여 있다.다음 문서 묶음은 위와 동일한 것들이나 1872년 2월 1일 전라관찰사의 관문만 위와 다르다. 순서는, 발사, 1872년 2월 1일 전라관찰사의 관문, 1872년 부안현감의 서목, 경조관문, 1873년 부안현감의 첩보, 1872년 부안현감의 서목, 1865년 전라관찰사의 완문, 1898년 재판소판사 이완용의 판결서, 1898년 김주상의 다짐, 1898년 부안현감의 고시(告示), 1922년 농상공부산림국의 지적계증명서, 1921년 3월 부안군수의 벌채 허가서 1921년 10월 벌채 허가서, 1923년 부령면장의 동일산명증서(同一山名証書), 부안김씨세보권지일, 1872년 2월 전라관찰사의 관문, 1873년 2월 4일 전라관찰사의 감결이 있다.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 회사관(會査官)의 발사(跋辭) : 최인감(崔仁鑑) 등의 선세(先世) 7총의 광중(壙中)이 파헤쳐져 유골이 드러나고 사토(莎土)가 벗겨져 있으니 누군가 무덤을 파낸 형국이 확실하며, 최씨산의 소나무는 솔밭의 너비와 둘레를 볼 때 1만여 주(株)가 된다는 내용이다.2. 형조(刑曹)의 관문(關文 : 최씨 산의 소나무를 김씨가 작벌하였다는 내용이 영읍(營邑)의 사안(査案)에 있으니, 소나무 값을 거둬들여 봉류(捧留)하고 보고하라고 하였다.3. 경조관문(京兆關文) : 김홍제(金弘濟) 등이 위권을 빙자하여 남의 묘소를 파냈으니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권을 환수하고 김홍제 등을 처벌할 것과 소나무 값을 받아서 줄 것을 관찰사에게 지시하였다.4. 1872년(고종 9) 8월 8일 부안현감의 서목(書目) : 김홍제의 소나무 값을 재감(裁減)해 달라고 하였다.5. 1873년(고종 10) 2월 4일 전라관찰사의 감결(甘結) : 형조의 관문대로 봉류(捧留)한 소나무값 1만 냥을 조영소(造營所)에 올려보낼 것, 최광권에게 1만 냥을 받았다는 수표를 받아 영진고(營賑庫)에 둘 것, 김홍제에게는 송사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다짐(侤音)을 받고 풀어 줄 것을 지시하고 첩보하도록 하였다.6. 1873년 2월 19일 부안현감의 첩보(牒報) : 최씨의 주장 중 김씨측이 1860년에 송사(訟事)를 일으킨 것은 1788년(정조 12)의 위첩(僞牒)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 하니 문권을 말소할 때 이것을 포함시켜야 하며, 김홍제가 운현(雲峴)에게 호소할 때에 근거로 삼을 만한 문서를 점련하였다고 하니 이 문권(文券)도 현납(現納)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7. 1872년 2월 20일 부안현감의 서목 : 김홍제를 가두고 문권을 현납(現納)하게 하였다는 내용이다.8. 1865년(고종 2) 전라관찰사의 완문(完文) : 최(崔)・김(金)의 석동산을 둘러싼 산송을 처결하면서 석동산이 최씨 소유임을 확인하여 준 문서이다. 산지와 소나무는 최민(崔民)에게 전속시키고 이른바 소윤묘는 김씨로 하여금 수호하게 한다는 내용이다.9. 1898년(고종 35) 10월 전라관찰사 겸 재판소판사(裁判所判事) 이완용(李完用)의 판결서 : 두 집안의 산송은 득실(得失)이 반반이다. 식송의 방법은 경계를 정하여 각각 수호(守護)하는 것뿐이니 소송문서들을 모두 소각하라고 하였다.10. 1898년 10월 5일 김주상(金周相)이 관에 올린 다짐(侤音) : 지금 집에 누락되어 있던 7장을 찾아내 납부하여 불태웠으며 다른 문축은 더 없다고 하였다.11. 1898년 10월 29일 부안군수(扶安郡守) 고시(告示) : 소나무는 최씨(崔氏)가 기른 것이니 이미 작벌한 것을 돌려주라고 하였다.12. 1923년 2월 4일 지적계증명서(地籍屆証明書) : 최병욱(崔炳郁)의 부안군(扶安郡) 부령면 연곡리 임야에 대해 지적계증명원(地籍屆証明願)에 대해 소유사실을 확인하여 준 것이다.13. 1921년 3월 5일 부안군수의 벌채(伐採) 허가서(許可書) : 최병욱(崔炳郁) 석동산(席洞山)에서 침엽수 100그루를 벌채하겠다고 신청하자 부안군수가 이를 허가하였다.14. 1921년 10월 25일 부안군수의 벌채 허가서 : 최병욱(崔炳郁)이 침엽수 1,500속(束)을 벌채하겠다고 신청하자 부안군수가 이를 허가하였다.15. 1923년 12월 10일 부령면장(扶寧面長)의 동일산명증명서(同一山名証明書) : 최병욱(崔炳郁)의 석동산이 일명 도동산(道洞山)임을 증명해 달라는 신청에 대해 틀림없음을 증명하였다.16. 1846년(헌종 12)에 발행된 부안김씨세보권지일(扶安金氏世譜卷之一) : 군사공 최광서(崔光敍)의 묘가 석동산에 있고 그 자손들이 옹정촌(瓮井村)에 거주하며 대대로 석동산에 입장(入葬)되었다는 것과 석동산을 저동산(猪洞山) 혹은 도동산(道洞山)으로 불렀음을 입증하는 자료이다.17. 1872년 2월 1일 전라관찰사의 감결(甘結) : 형조의 관문대로 대원위(大院位)가 '이 산송(山訟)은 위선(爲先)에 있지 않고 오로지 이익을 꾀하는 데에 있으니, 해괴하기 짝이 없다. 최씨 산의 소나무를 김씨가 작벌하였다는 내용이 영읍(營邑)의 사안(査案)에 있으니, 소나무 값을 거둬들여 봉류(捧留)하고 보고하라. 다시 혹 이처럼 건송(健訟)하고 산송을 빙자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자는 모두 엄하게 다스리며, 징수하여 속공(屬公)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으라.'라고 하였으니 분부대로 거행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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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跋辭
爲等如各人等招辭是置有亦蓋此山一訟厥
有層節積年擾鬧無異吳楚之爭牒歷世
怨嫌不啻越秦之視瘠屢犯 蹕路是非各
歸一邊互陳狀辭曲直不待兩招是如乎 先
審山形更詳輿論則席洞之山斗起一峰向
南之麓列如川字東二麓爲金山西一麓爲
崔山累累入葬世世聚骨是乎所今此少
尹墓在於崔山之西合谷之下而東邊有崔
仁鑑等先世六塚四邊有崔榮權之高祖一
塚或掘壙中幾至屍骸或去莎土纔經分寸此
則掘塚之形止也松楸段大者如柱小者如椽
長養蓊蔚延袤廣濶樵牧之所指點行路之
所健羨是去乙拓開墓門斫去山麓此多彼
寡雖難準信執端折衷庶可斟量崔狀五六
萬云者頗近增価金招七十兩云云者亦涉
減竈執此幅圓較彼松田則竝其大小洽爲万
餘株是乎乃根之見在者少掘去者多而已掘
者爲莎所塡摘奸時猝難執數以若臆料不可
質言此則斫松之大槪也斫彼萬株連抱之松已
是不良掘此七箇枯骨之塚尤極絶悖竊念
七月短宵之時宵非獨辦之事而掘律恐
或及已諸金具曰不知中略
會査官
行郡守 [華押]
行>府使 [華押]
--
京兆關文
漢城府爲相考事卽接道內扶安幼學崔俊
煥所訴則金弘濟等之誣捏罪惡萬戮猶
輕分叱除良七塚私掘而以有主謂無主誣
圖關文今欲更屈凶莫凶矣渠墓旣失於
高麗之世而做此借葬之說欲奪四百年守
護之地拔賣萬餘株連抱之松潛掘二百年年
久之塚變莫變矣曲直自歸於絶約是非
亦判於緊歇其在按公寧不憤痛裁卽
蒙 啓敎之截嚴還推山之還封七塚而今又
圖去關文囑囚崔民謀奪謀掘敢藉庚申暗
造之券此不知 王章之爲鄭重但知欺瞞之爲
得計究厥所爲萬萬驚駭不能的知渠墓之眞
贋而構捏謀掘者專爲奪松之計也設令
渠祖借葬於四百年之前欲奪於四百年之後
以彰其祖之惡抑何道理甚至於
天聽文字亦皆誣罔專事圖奪揆以典憲
不可揜過玆以發關爲去乎到卽關於該邑
日前爲金之關文還收上送是遣金弘濟金
用均金文濟依律定罪謀掘之塚嚴飭禁
斷前後構誣文券卽推燒火山地及松価不
日內一一推給仍成公案俾戢狡獝之惡習
卽爲馳報爲當者
--
扶安縣監書目
本縣民金弘濟等所納松価幾許間裁減事
處分行下狀
同治十一年八月初八日行縣監 鄭
松價之定數營亦不可
增減是在果大抵
以其數不可擬議更
加嚴督期於不日收
屬後形止馳報向
事
壬申八月初十日
兼使 [華押]
--
癸酉二月初四日 甘結
節到付刑曹關內卽到貴移扶安金弘濟
處松価懲捧錢二萬五千兩內一萬兩捧留一
萬兩出給崔光權後捧標五千兩還給成冊幷
爲入 鑑是在果
大院位敎是 分付內松価捧留錢一萬兩卽速
上送于營造所是矣有山然後有松捧価者
爲山主不待更卞是如乎金弘濟前後訟牒
一一現納官庭爻周是遣復或以此起訟之弊
則當有別般嚴繩矣以此捧侤放送爲旀同侤
音堅封上送事奉分付玆以發關爲旀
崔光權標粘連還送爲去乎到關卽時相考
擧行爲旀形止亦卽回移以爲入鑑憑處之地
宜當向事關是置有亦本縣民金崔山訟
今始決末誠甚豁然捧留錢一萬兩今方上送
于營造所是在果崔光權所捧一萬兩標
紙任置營賑庫以爲日後憑考是遣金弘濟
段其前後訟牒官庭現納卽爲爻周以更勿
起訟之意捧侤音上送而弘濟卽爲放送牒
報宜當者
兼使 華押
--
癸酉二月十九日
爲牒報事卽得到貴移刑曹關據使甘結內
節到付刑曹關內卽到貴移扶安金弘濟處
松価懲捧錢二萬五千兩內一萬兩捧留一萬兩
出給崔光權後捧標五千兩還給成冊竝爲入
鑑是在果
大院位敎是分付內松価捧留錢一万兩卽速
上送于營造所是矣有山然後有松捧価者爲
山主不待更卞是如乎金弘濟處前後訟牒
一一現納官庭爻周是遣復或以此起訟之弊則
當有別般嚴繩矣以此捧侤放送爲旀同侤音
堅封上送事奉 分付玆以發關爲旀崔光
權標粘連還送爲去乎到關卽時相考擧行
爲旀形止亦卽回移以爲入鑑憑處之地宜當
向事關是置有亦本縣民金崔山訟今始決
末誠甚豁然捧留錢一萬兩今方上送于營
造所是在果崔光權所捧一萬兩標紙任置
營賑庫以爲日後憑考是遣金弘濟段其前後訟
牒官庭現納卽爲爻周以更勿起訟之意捧侤音
上使以爲上送之地而弘濟卽爲放送牒報宜當
者甘結是置有亦本縣民金弘濟崔光權等
竝招致謹將甘辭仍各曉諭前後訟牒一一責現
於金弘濟處則其所告內今此訟斷始起於去庚
申年間而同決訟時文券十二丈其翌辛酉四月
日因營甘分界息訟次幷與崔隻文券而上送
營門仍爲未推是乎乙遣其後可據文券六七
丈昨年間呈籲 雲峴時粘連原狀以上矣未承
題敎旋有矣身押付完營之處分蒼黃赴捉之
際果未知狀卷之何處下落而目今矣身處留在
之卷只是庚申決訟時山地立案一卷辛酉刑配時
卞誣與松価寃懲呼訴等狀二十六丈故玆以現納
而更無餘存是如爲乎旀崔光權所告內金弘濟
等之庚申起訟實因於康熙年間僞牒留在之故而
哲廟朝判決嚴明之有刑配之典猶不知戢出沒京
鄕惹起鬧端矣今番京營關敎深軫後弊前後
文券現納使之爻周然後可杜後弊是如爲有置蓋
此前後訟券之爻周寔出於杜後弊之處分則自邑
擧行有不容疏忽是如乎金弘濟所納之券雖爲
數十餘張而崔民所供之中旣以緊藏歇現爲告
故果爲訴考金券則初無立落緊切之案只有
營邑尋常之狀以若積年互相勝負之訟豈無
得失可據之蹟哉緊藏歇現果如崔說分叱除
良崔說中金民等之庚申起訟實緣康熙戊申僞
牒留在云者於此可驗而其所日後更鬧之計不見是
圖今若任他匿券不入於爻周則恐難免不審之責
故前後訟牒嚴加申飭使之逐一現納則惟彼弘濟
只懷落科之憾瞀不畏法自同几肉屢度責現
一直拒納雖以
雲峴呈籲時可據文券粘連遺落之說觀之計
出粧撰極涉痛惋而文券捧侤反致葛藤其
在奉分付擧行之道事甚憂悶乙仍于同金
弘濟嚴囚緣由槪報使敎是別般嚴飭現納
文券事處分爲只爲
巡營
官 華押
--
부안현감書目
本縣民金弘濟嚴囚現納文券事緣由狀
同治十一年二月二十日行縣監 鄭
所謂文券隨所納一
一爻周亦捧侤音則
設或有如干藏置之
文券焉敢更起卽速
擧行向事
癸酉二月卄三日
兼使 [華押]
--
營門完文 乙丑十二月
右完文事段扶安士人崔鳳煥十三世以下繼葬數
百墓之地在於本縣席洞山西一麓無弊守護爲
四百餘年而昭載於金譜及邑案矣粵在百餘
年前縣人金達壽等以崔山局內自古諺傳一
大竹墳謂渠遠祖少尹失傳之墓而始自尋護
此雖未能的知其墓之眞贋而渠旣稱渠祖
之墓則祗守其墓於理當然不意去庚申年
冬達壽之後孫金邦濟弘濟等敢生壑慾
暗圖京兆關文欺瞞營邑而發賣松楸奪
燒文蹟酷刑四人兼奪山地潛掘年久七塚則崔
民兩次鳴金至蒙截嚴之判敎被掘之塚還封
築山地松楸始得還推 啓下一律罪人金邦
濟止爲久囚弘濟等皆爲定配而見斫松楸枯(姑)
未推価囚竄諸金族卽蒙放可謂於渠則幸矣
而至於崔民被掘之寃尙未快伸況此四百年禁
護之地及屢萬株連抱之松一朝見失於讎人之乎
其所血寃容有極乎凶彼弘濟等素以蔑法
流甚至於
天聽文字亦皆誣罔以私掘七塚一曰崔塚六曰古
塚云究厥所爲死有餘罪而不遵 啓敎之嚴重
不有營邑之査決藉渠吏族之權恃渠賄囑之
勢而以啓下還封之塚謂之以私封更欲謀掘以
啓下還推之地稱之以渠山而渠亦有完文云此是
前前官見欺暗造者也且其後以爲道査至於
上徹始爲歸正則此文將焉用之乎每率無賴
更斫餘木甚至於旌閭前各種屢百年古木近
又亂斫謀毁旌閭墓幕內懷都占之計外做定
界之言果欲定界則所謂少尹墓前後左右
皆是崔塚則何以定界乎强欲定界則此亦法
外之悖類抑亦化外之亂氓大抵累百年守護之地
忽於一朝圖奪凶習旣至此極而亦將越視則民
何保其先塋國安用乎定法蔽一言旣有啓
敎之鄭重且有營邑之斷案則山地松楸專屬
崔民所謂少尹墓則使金守護事合穩當矣
自今以往山地松楸永屬崔民雖一片土一箇木
莫非崔民之有則金民更不得犯着之意成
給完文日後諸金中不悛前習若更起鬧
則非徒荷杖且係不法以此文永久遵行
宜當事
--
判決書
扶安金周相崔斗榮兩家先壟俱在於席洞
山而積年爭訟曲直之際得失相半京營之間
斷案各有矣今又崔佾榮告訴于高等裁
判所有承合場質査之指令而(兩)隻幷招致府
庭屢回對質參考狀軸則崔塚之督掘理所
不當松価之責還尤非可論惟其息訟之方只
在定界而各守故(護)使於今番巡邑之行歷過
是郡招待兩隻于山處仍與郡守同往躬審
形便劃定界限後兩隻處捧侤音永爲妥帖
而兩家前後訟軸一切燒却是遣今此判決書
五件成出一本粘付報告于高等裁判所二本
分置府郡二本分給兩家是如乎准此憑
後事
扶安郡席洞山金崔兩塚分界限標
自金少尹墓至崔榮權墓爲四十四步四尺內
半分二十二步二尺式定界
自金少尹墓西至田頭爲七十八步三尺九寸內
半分三十九步一尺九寸式定界
自金崔塚半分處西至二十五步三尺六寸定
界處上至上小路三十七步三尺定界
自金少尹墓左東至八步三尺五寸自上北小
路下直至南畓頭定界
金崔兩家總代員
幼學崔斗榮年四十八白
幼學崔鴻坰年五十一白
幼學崔仁灃年四十二白
幼學金周相年六十二白
幼學金東容年五十五白
幼學金洛瑾年五十七白
白等矣等兩家先壟今旣定界準此施行無
相起閙是遣前後兩邊訟軸一切燒火而兩
隻文蹟中設有漏落者此是燼餘之物不
足憑以此納侤事
光武二年十月日
裁判所判事 李完用(印)
山在官郡守 兪鎭哲(印)
主事 郭昌根(印)
--
戊戌十月初五日幼學金周相
年六十二
白等矣等兩家先壟旣觀察使道親審
定界而兩隻文軸亦於當場燒却然兩隻間
慮有遺漏文軸互相爲言而矣家遺落七
張今又覓納付丙則以更無他軸之意納侤
以此憑後敎事
官(印) 白啣
--
告示 崔門中
金崔兩家山地分界各捧手本報告于觀察
府回題內松是崔民之養已爲斫伐出給後更
報敎是故以此意已爲告示於金門中是在
果松楸段令到卽時使之斫伐以去形止馳報
以爲轉報之地事
再令到形止卽爲馳報次
戊戌十月二十九日
官(印)
--
地籍屆証明願
地籍屆人住所氏名
扶安郡保安面牛東里
崔炳郁
不動産ノ表示
扶安郡扶安面蓮谷里(席洞山)
一.林野拾五町三反三畝二十八步
右林野ニ対スル地籍屆ナシタルコトヲ御証明相
成度此段奉願候也
大正拾一年貳月四日
右崔炳郁
扶安郡守 殿
前記之通相違無之事証明ス
大正拾壹年貳月四日
扶安郡守(印)
提出ᄒᆞᆫ地籍報告三度ᄂᆞᆫ本日에接受事
隆熙四年六月九日
農商工部山林局(印)
--
扶庶第六四八号
出願者 崔炳郁
大正拾年二月二十五日付願私有林伐採의採取ノ件
左와如히ノ通リ許可ス
大正拾年三月五日
扶安郡守 印
記
一.林野/所在 扶安扶寧面蓮谷里席洞山麓
一.面積 元十五町三反三畝二十八步內
二町-反-畝-步
一.樹種別 針葉樹
一.伐採採取數量 一○本
一.伐採採取其間 三月十六日迠
下略
--
扶庶第二.八九一号
出願者 崔炳郁
大正拾年十月十一日付願私有林伐採의採取ノ件左와
如히ノ通リ許可ス
大正拾年十月卄五日
扶安郡守
記
一.林野/所在 扶安郡扶寧面蓮谷里西麓
一.面積 七町-反-畝-步
一.樹種別 針葉樹
一.伐採採取 數量 壹千五百束
一.伐採採取 其間 十一月五日迠
下略
--
同一山名証明願
右ハ扶安郡扶寧面蓮谷里區內ニ本人ノ先
墓所在スル席洞山名/在來一名道洞山名相
違ナキコトヲ証明相成度相願候也
大正拾貳年拾壹月拾日
扶安郡保安面牛東里五八四番地
願人 崔炳郁
扶寧面長殿
右願ノ通リ相違ナキコトヲ証明ス
右ハ扶安郡扶寧面蓮谷里區內ニ本人ノ先
墓所在スル席洞山名ハ在來一名道洞山
名相違ナキコトヲ証明相成度相願候也
大正拾二年拾一月拾日
扶安郡保安面牛東里五八四番地
願人 崔炳郁
扶寧面長 殿
大正拾貳年拾壹月拾日
全羅北道扶安郡扶寧面長
辛聲錫(印)
謄寫
扶安郡輿地勝覽
輿地勝覽第二張第三十九行道洞山在縣南
五里許或云猪洞或云席洞蓋猪與席俗音與
道相近故錯稱焉山有三壟金崔宋族山
崇禎紀元後再己卯五月下澣修正
--
扶安金氏世譜卷之一(崇禎四丙午暮春刊印)
中略
光敍[奉正大夫知告[古]
阜郡事
配淑人開城王氏
父高麗宗
室昌寧君洞外
祖元世祖墓
合在席洞山中
麓中腦下之中
癸坐有表石
麗朝亡我朝興
公自古阜大歸
貫鄕之扶寧
卜居縣南五里許
瓮井村占兆
于村西席洞山川
宇局自此以
後子孫世世居
住於瓮井村世世
入葬於席洞山云
席洞山或云
猪洞山或云道洞山
主有兩峙曰
望氣峯前有一
池曰建善堤左
有回顧曰傘頭
峙右有環夬曰
幸安山中有長
谷曰賢孫谷谷
有齋室曰德星
庵庵之名蓋取
林億齡詩金家
聚德星之意也
川字局西一麓
爲崔生明子孫
之族山東二麓
爲郡事公子孫
之世葬松楸蔚
蒼碑碣葱立
四百餘年守護中略] 子璫[中略] 子悔愼[中略] 子銑[中略]
--
跋辭
爲等如各人等招辭是置有亦蓋此山一訟厥
有層節積年擾鬧無異吳楚之爭牒歷世
怨嫌不啻越秦之視瘠屢犯 蹕路是非各
歸一邊互陳狀辭曲直不待兩招是如乎 先
審山形更詳輿論則席洞之山斗起一峰向
南之麓列如川字東二麓爲金山西一麓爲
崔山累累入葬世世聚骨是乎所今此少
尹墓在於崔山之西合谷之下而東邊有崔
仁鑑等先世六塚四邊有崔榮權之高祖一
塚或掘壙中幾至屍骸或去莎土纔經分寸此
則掘塚之形止也松楸段大者如柱小者如椽
長養蓊蔚延袤廣濶樵牧之所指點行路之
所健羨是去乙拓開墓門斫去山麓此多彼
寡雖難準信執端折衷庶可斟量崔狀五六
萬云者頗近增価金招七十兩云云者亦涉
減竈執此幅圓較彼松田則竝其大小洽爲万
餘株是乎乃根之見在者少掘去者多而已掘
者爲莎所塡摘奸時猝難執數以若臆料不可
質言此則斫松之大槪也斫彼萬株連抱之松已
是不良掘此七箇枯骨之塚尤極絶悖竊念
七月短宵之時宵非獨辦之事而掘律恐
或及已諸金具曰不知 中略
會査官
行郡守 [華押]
行府使 [華押]
--
同治十一年二月初一日
節到付刑曹關內卽到貴移道內扶安縣崔
光權金邦濟等山訟査案入鑑是在果
大院位敎是分付內山訟者爲先血爭之事而
今此山訟心不在於爲先計專在於牟利倫理
之斁絶俗習之駭悖莫此爲甚分叱除良崔
松金斫營邑之査案自在是去乙敢以松価
不報之計藉以金山還掘之說者究厥心腸
尤極狡惡松価刻期督捧捧留報來以待處
分是遣復或以此等事健訟爲習憑藉山訟
計在財利者一倂嚴繩懲捧屬公之意著爲
定式事奉 分付玆以發關爲去乎到卽
時星火擧行爲旀先從松価數爻而枚擧回
移以爲入 鑑受處分之地宜當向事照
驗施行須至 關者
右關
全羅道觀察使
關 [華押]
--
부안현감書目
本縣民金弘濟等所納松価幾許間裁減事
處分行下狀
同治十一年八月初八日行縣監 鄭
松價之定數營亦不可
增減是在果大抵
以其數不可擬議更
加嚴督期於不日收
屬後形止馳報向
事
壬申八月初十日
兼使 [華押]
--
京兆關文
漢城府爲相考事卽接道內扶安幼學崔俊
煥所訴則金弘濟等之誣捏罪惡萬戮猶
輕分叱除良七塚私掘移以有主謂無主誣
圖關文今欲更屈凶莫矣渠墓旣失於
高麗之世而做此借葬之說欲奪四百年守
護之地發賣萬餘株連抱之松潛掘二百年年
久之塚變莫變矣曲直自歸於强弱是非
亦判於緊歇其在按公寧不憤痛裁卽
蒙 啓敎之截嚴還推山地還封七塚而今又
圖去關文囑囚崔民謀奪謀掘敢藉庚申暗
造之券此不知 王章之爲鄭重但知欺瞞之爲
得計究厥所爲萬萬驚駭不能的知渠墓之眞
贋而構捏謀掘者專爲奪松之計也設令
渠祖借葬於四百年之前欲奪於四百年之後
以彰其祖之惡抑何道理甚至於
天聽文字亦皆誣罔專事圖奪揆以典憲
不可揜過玆以發關爲去乎到卽嚴關於該邑
日前爲金之關文還收上送是遣金弘濟金
用均金文濟依律定罪謀掘之塚嚴飭禁
斷前後構誣文券卽推燒火山地及松価不
日內一一推給仍成公案俾戢狡獝之惡習
卽爲馳報爲當者
--
癸酉二月十九日
爲牒報事卽到貴移刑曹關據使甘結內
節到付刑曹關內卽到貴移扶安金弘濟處
松価懲捧錢二萬五千兩內一萬兩捧留一萬兩
出給崔光權後捧標五千兩還給成冊竝爲入
鑑是在果
大院位敎是分付內松価捧留錢一万兩卽速
上送于營造所是矣有山然後有松捧価者爲
山主不待更卞是如乎金弘濟處前後訟牒
一一現納官庭爻周是遣復或以此起訟之弊則
當有別般嚴繩矣以此捧侤放送爲旀同侤音
堅封上送事奉 分付玆以發關爲旀崔光
權標粘連還送爲去乎到關卽時相考擧行
爲旀形止亦卽回移以爲入鑑憑處之地宜當
向事關是置有亦本縣民金崔山訟今始決
末誠甚豁然捧留錢一萬兩今方上送于營
造所是在果崔光權所捧一萬兩標紙任置
營賑庫以爲日後憑考是遣金弘濟段其前後訟
牒官庭現納卽爲爻周以更勿起訟之意捧侤音
上使以爲上送之地而弘濟卽爲放送牒報宜當
者甘結是置有亦本縣民金弘濟崔光權等
竝招致謹將甘辭仍各曉諭前後訟牒一一責現
於金弘濟處則其所告內今此訟端始起於去庚
申年間而同決訟時文券十二丈其翌辛酉四月
日因營甘分界息訟次幷與崔隻文券而上送
營門仍爲未推是乎乙遣其後可據文券六七
丈昨年間呈籲 雲峴時粘連原狀以上矣未承
題敎旋有矣身押付完營之處分蒼黃赴捉之
際果未知狀卷之何處下落而目今矣身處留在
之卷只是庚申決訟時山地立案一卷辛酉刑配時
卞誣與松価寃懲呼訴等狀二十六丈故玆以現納
而更無餘存是如爲乎旀崔光權所告內金弘濟
等之庚申起訟實因於康熙年間僞牒留在之故而
哲廟朝判決嚴明之有刑配之典猶不知戢出沒京
鄕惹起鬧端矣今番京營關敎深軫後弊前後
文券現納使之爻周然後可杜後弊是如爲有置蓋
此前後訟券之爻周寔出於杜後弊之處分則自邑
擧行有不容疏忽是如乎金弘濟所納之券雖爲
數十餘張而崔民所供之中旣以緊藏歇現爲告
故果爲訴考金券則初無立落緊切之案只有
營邑尋常之狀以若積年互相勝負之訟豈無
得失可據之蹟哉緊藏歇現果如崔說分叱除
良崔說中金民等之庚申起訟實緣康熙戊申僞
牒留在云者於此可驗而其所日後更鬧之計不見是
圖今若任他匿券不入於爻周則恐難免不審之責
故前後訟牒嚴加申飭使之逐一現納則惟彼弘濟
只懷落科之憾瞀不畏法自同几肉屢度責現
一直拒納雖以
雲峴呈籲時可據文券粘連遺落之說觀之計
出粧撰極涉痛惋而文券捧侤反致葛藤其
在奉分付擧行之道事甚憂悶乙仍于同金
弘濟嚴囚緣由槪報使敎是別般嚴飭現納
文券事處分爲只爲
巡營
官 [華押]
--
부안현감書目
本縣民金弘濟嚴囚現納文券事緣由狀
同治十一年二月二十日行縣監 鄭
所謂文券隨所納一
一爻周亦捧侤音則
設或有如干藏置之
文券焉敢更起卽速
擧行向事
癸酉二月卄三日
兼使 [華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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營門完文 乙丑十二月
右完文事段扶安士人崔鳳煥十三世以下繼葬數
百墓之地在於本縣席洞山西一麓無弊守護爲
四百餘年而昭載於金譜及邑案矣粵在百餘
年前縣人金達壽等以崔山局內自古諺傳一
大竹墳謂渠遠祖少尹失傳之墓而始自尋護
此雖未能的知其墓之眞贋而渠旣稱渠祖
之墓則祗守其墓於理當然不意去庚申年
冬達壽之後孫金邦濟弘濟等敢生壑慾
暗圖京兆關文欺瞞營邑而發賣松楸奪
燒文蹟酷刑四人兼奪山地潛掘年久七塚則崔
民兩次鳴金至蒙截嚴之判敎被掘之塚還封
築山地松楸始得還推 啓下一律罪人金邦
濟止爲久囚弘濟等皆爲定配而見斫松楸姑
未推価囚竄諸金族卽蒙放可謂於渠則幸矣
而至於崔民被掘之寃尙未快伸況此四百年禁
護之地及屢萬株連抱之松一朝見失於讎人之手
其所血寃容有極乎凶彼弘濟等素以蔑法
流甚至於
天聽文字亦皆誣罔以私掘七塚一曰崔塚六曰古
塚云究厥所爲死有餘罪而不遵 啓敎之嚴重
不有營邑之査決藉渠吏族之權恃渠賄囑之
勢而以啓下還封之塚謂之以私封更欲謀掘以
啓下還推之地稱之以渠山而渠亦有完文云此是
前前官見欺暗造者也且其後以爲道査至於
上徹始爲歸正則此文將焉用之乎每率無賴
更斫餘木甚至於旌閭前各種屢百年古木近
又亂斫謀毁旌閭墓幕內懷都占之計外做定
界之言果欲定界則所謂少尹墓前後左右
皆是崔塚則何以定界乎强欲定界則此亦法
外之悖類抑亦化外之亂氓大抵累百年守護之地
忽於一朝圖奪凶習旣至此極而亦將越視則民
何保其先塋國安用乎定法蔽一言旣有啓
敎之鄭重且有營邑之斷案則山地松楸專屬
崔民所謂少尹墓則使金守護事合穩當矣
自今以往山地松楸永屬崔民雖一片土一箇木
莫非崔民之有則金民更不得犯着之意成
給完文日後諸金中不悛前習若更起鬧
則非徒荷杖且係不法以此文永久遵行
宜當事
--
判決書
扶安金周相崔斗榮兩家先壟俱在於席洞
山而積年爭訟曲直之際得失相反京營之間
斷案各有矣今又崔佾榮告訴于高等裁
判所有承合場質査之指令而兩隻竝招致府
庭屢回對質參考狀軸則崔塚之督掘理所
不當松価之責還尤非可論惟其息訟之方只
在定界而各守故使於今番巡邑之行歷過
是郡招待兩隻于山處仍與郡守同往躬審
形便劃定界限後兩隻處捧侤音永爲妥帖
而兩家前後訟軸一切燒却是遣今此判決書
五件成出一本粘付報告于高等裁判所二本
分置府郡二本分給兩家是如乎准此憑
後事
扶安郡席洞山金崔兩塚分界限標
自金少尹墓地崔榮權墓爲四十四步四尺內
半分二十二步二尺式定界
自金少尹墓西至田頭爲七十八步三尺九寸內
半分三十九步一尺九寸式定界
自金崔塚半分處西至二十五步三尺六寸定
界處上至上小路三十七步三尺定界
自金少尹墓左東至八步三尺五寸自上北小
路下直至南畓頭定界
金崔兩家總代員
幼學崔斗榮年四十八白啣
幼學崔鴻坰年五十一白啣
幼學崔仁灃年四十二白啣
幼學金周相年六十二白啣
幼學金東容年五十五白啣
幼學金洛瑾年五十七白啣
白等矣等兩家先壟今旣定界準此施行無
相起鬧是遣前後兩邊訟軸一切燒火而兩
隻文蹟中設或有漏落者此是燼餘之物不
足爲憑以此納侤敎事
光武二年十月日
裁判所判事李完用(印)
山在官郡守 兪鎭哲(印)
主事 郭昌根(印)
--
戊戌十月初五日幼學金周相
年六十二
白等矣等兩家先壟旣承觀察使道親審
定界而兩隻文軸亦於當場燒却然兩隻間
慮有遺漏文軸互相爲言而矣家遺落七
張今又覓納付丙則以更無他軸之意納侤
以此憑後敎事
官(印) 白啣
--
告示 崔門中
金崔兩家山地分界各捧手本報告于觀察
府回題內松是崔民之養已爲斫伐出給後更
報敎是故以此意已爲告示於金門中是在
果松楸段令到卽時使之斫伐以去形止馳報
以爲轉報之地事
再令到形止卽爲馳報次
戊戌十月二十九日
官(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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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籍屆証明願
地籍屆人住所氏名
扶安郡保安面牛東里
崔炳郁
不動産ノ表示
扶安郡扶安面蓮谷里 (席洞山)
一.林野拾五町三反三畝二十八步
右林野ニ對スル地籍屆ナシタルコトヲ証明相
成度此段奉願候也
大正拾一年貳月四日
右 崔炳郁
扶安郡守殿
前記之通相違無之事證明ス
大正拾壹年貳月四日
扶安郡守(印)
提出ᄒᆞᆫ地籍報告三度ᄂᆞᆫ本日에接受事
隆熙四年六月九日
農商工部山林局[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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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庶第六四八号
出願者崔炳郁
大正拾年二月二十五日付願私有林伐採의採取ノ件
左와如히ノ通リ許可ス
大正拾年三月五日
扶安郡守(印)
記
一.林野/所在 扶安扶寧面蓮谷里席洞山麓
一.面積 元十五町三反三畝二十八步內
二町-反-畝-步
一.樹種別 針葉樹
一.伐採採取數量 一○本
一.伐採採取期間 三月十六日迠
下略
--
扶庶第二.八九一号
出願者 崔炳郁
大正拾年二月二十五日付願私有林伐採의採取ノ件左와
如히通リ許可ス
大正拾年十月二五日
扶安郡守(印)
記
一.林野/所在 扶安郡扶寧面蓮谷里西麓
一.面積 七町-反-畝-步
一.樹種別 針葉樹
一.伐採採取 數量 壹千五百束
一.伐採採取 其間 十一月五日迠
下略
--
同一山名証明願
右扶安郡扶寧面蓮谷里區內ニ本人ノ先
墓所在スル席洞山名ハ在來一名道洞山名相
違ナキコトヲ証明相成度相願候也
大正拾二年拾一月拾日
扶安郡保安面牛東里五八四番地
願人 崔炳郁
扶寧面長殿
右願ノ通リ相違ナキコトヲ証明ス
大正十二年十二月十日
全羅北道扶安郡扶寧面長
辛聲錫
謄寫
扶安郡輿地勝覽
輿地勝覽第二張第三十九行道洞山在縣南
五里許或云猪洞或云席洞蓋猪與席俗音與
道相近故錯稱焉山有三壟金崔宋族山
崇禎紀元後再己卯五月下澣修正
--
扶安金氏世譜卷之一(崇禎四丙午暮春刊印)
中略
光敍
奉正大夫知古
阜郡事
配淑人開城王氏
父高麗宗
室昌寧君洞外
祖元世祖墓
合在席洞山中
麓中腦下之中
癸坐有表石
麗朝亡我朝興
公自古阜大歸
貫鄕之扶寧
卜居縣南五里許
瓮井村占兆
于村西席洞山川
宇局自此以
後子孫世世居
住於瓮井村世世
入葬於席洞山△
席洞山或云
猪洞山或云道洞山
主有兩峙曰
望氣峯前有一
池曰建善堤左
有回顧曰傘頭
峙右有環夬曰
幸安山中有長
谷曰賢孫谷谷
有齋室曰德星
庵庵之名蓋取
林億齡詩金家
聚德星之意也
川字局西一麓
爲崔生明子孫
之族山東二麓
爲郡事公子孫
之世葬松楸蔚
蒼碑碣葱立
四百餘年守護
[中略]
子璫[中略]
子悔愼[中略]
子銑[中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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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治十一年二月初一日
節到付刑曹關內卽到貴移道內扶安縣崔
光權金邦濟等山訟査案入鑑是在果
大院位敎是分付內山訟者爲先血爭之事而
今此山訟心不在於爲先計專在於牟利倫理
之斁絶俗習之駭悖莫此爲甚分叱除良崔
松金斫營邑之査案自在是去乙敢以松価
不報之計藉以金山還掘之說者究厥心腸
尤極狡惡松価刻期督捧捧留報來以待處
分是遣復或以此等事健訟爲習憑藉山訟
計在財利者一倂嚴繩懲捧屬公之意著爲
定式事奉 分付玆以發關爲去乎到卽
時星火擧行爲旀先從松価數爻而枚擧回
移以爲入 鑑受處分之地宜當向事照
驗施行須至 關者
右關
全羅道觀察使
關 [華押]
--
癸酉二月初四日 甘結
節到付刑曹關內卽到貴移扶安金弘濟
處松価懲捧錢二萬五千兩內一萬兩捧留一
萬兩出給崔光權後捧標五千兩還給成冊幷
爲入 鑑是在果
大院位敎是分付內松価捧留錢一萬兩卽速
上送于營造所是矣有山然後有松捧価者
爲山主不待更卞是如乎金弘濟前後訟牒
一一現納官庭爻周是遣復或以此起訟之弊
則當有別般嚴繩矣以此捧侤放送爲旀同侤
音堅封上送事奉分付玆以發關爲旀
崔光權標粘連還送爲去乎到關卽時相考
擧行爲旀形止亦卽回移以爲入鑑憑處之地
宜當向事關是置有亦本縣民金崔山訟
今始決末誠甚豁然捧留錢一萬兩今方上送
于營造所是在果崔光權所捧一萬兩標
紙任置營賑庫以爲日後憑考是遣金弘濟
段其前後訟牒官庭現納卽爲爻周以更勿
起訟之意捧侤音上送而弘濟卽爲放送牒
報宜當者
兼使 [華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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