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8월에 기응도(奇應度)가 인척(姻戚) 이광수(李光秀)에게 화순 물염정(勿染亭) 적벽(赤壁) 모임에 동참할 것을 요청한 내용의 편지이다. 초 4일에 우봉(牛峯) 안씨(安氏) 친구 편에 편지를 보냈는데, 잘 전달되었는지 알 수 없다며 답답한 마음을 표했다. 이어 요사이 부모님을 모시고 공부하는 생활은 어떠한지 묻고, 이광수에 대한 그리움 마음을 전했다. 갈대의 흰 이슬 맺힌 가을날 그리움이 싹트고, 창에 비친 달빛이 하얗게 흘러들 때 누워서 멀리 담양에 사는 미중(美仲, 이광수의 자(字))을 떠올린다고 하며 그리움을 시적으로 표현했다.
계속해서 유람에 대한 생각을 전하고 함께 할 것을 독려했다. 처음에 금재(欽齋)와 구동(龜東)과 함께 먼저 이광수 집을 방문해서 능성(綾城, 현재 화순)을 관광하려 계획을 세웠고, 황룡의 중동(中洞)에 사는 김씨(金氏) 형과 사방의 학자들도 함께 움직이려 했다는 것이다. 본래 저쪽 편 사람이 아닌데도 다행히 태평성세를 만나 비록 재주도 학식도 없지만, 어찌 한 번의 거동도 없겠으며, 또 오랜 병중 생활을 털어내고 유람을 하는 것은 적막을 지키고 마음만 상하게 하는 것보다는 나을 듯 하다고 하였다. 그곳에서 정답게 만나 많은 술을 마시고, 제비를 뽑아 시문(詩文)을 겨루며 호로(呼盧)와 악삭(握槊) 같은 투전 놀이도 하다 보면 더욱 호해(湖海)의 기상을 얻고 간담을 키우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석(池石)과 해망(海望) 사이에서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이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 1898~1977)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