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학(李承鶴)이 동생에게 귀가가 늦어진 이유와 여러 가지 집안일에 대한 당부를 전한 내용의 편지이다. 화촌(華邨) 편으로 보낸 편지의 도착 여부를 물으면서 그 편지에서 언급한 귀에 대한 사정을 적었다. 귀가할 날짜를 정하려고 했으나 확정하여 어렵다고 하면서 그 연유를 전했다. 서울에서 과거 시험을 위해 세월을 보내고는 있지만, 미련이 없기를 위해서라도 서울에 더 머무는 것이 무익하게 돌아가는 것보다 낫다는 내용으로 동생을 설득하였다. 또 양씨(梁氏)와 기씨(奇氏) 두 분과 함께 거처하면서 함께 행동하기로 작정했는데, 그들이 서울에서 여름을 넘기기로 계획했다는 것이다. 이승학도 앞으로 있을 회시(會試)를 위해 7월까지는 머무를 것이라고 하면서 귀가를 미룰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혔다. 또 임금께서 능행(陵行)이 있고 나서 증광시(增廣試)가 열릴 것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이는 헛된 소문이 아닐 것이라고 하면서 과거 시험에 대한 희망을 동생들께 전달하기도 했다. 이승학이 귀가가 늦어지는 이유에 대해 상세하게 알린 것으로 보아 동생들이 이승학의 귀가를 재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생들이 이승학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지 않아 수신자의 입장을 파악할 수 없어 아쉽다.
편지 중반에는 여러 가지 집안일에 관한 것으로 채워졌다. 이승학은 집안일의 낭패는 스스로 도모한 것이 아니라 가운(家運)이 그러해서이니 깊이 우려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이때 말한 집안일에 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이전 편지에서 누이의 혼사를 지속해서 말한 것으로 보아 혼사가 성사되지 않은 일을 이른 듯하다. 이어 이승학은 본인이 서울에 있으면서 가족들을 돌보지 않은 죄책감을 표하며 과거 시험에 대한 결심을 전했다. 그는 동생들이 식솔들의 생활을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하면서 올해를 기한으로 더는 과거 시험을 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본인이 없는 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참고 견디라고 당부한 내용과 농사와 독서를 신경 쓰라고 당부한 내용 등을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눈앞의 어려움 때문에 곡식의 종자(種子)를 함부로 사용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하면서 편지를 마쳤다.
추신으로 용국(龍國) 형 편에 부친 편지를 받아 보았는지를 물었다. 이승학은 서울에 있으면서 아는 인편을 통해 편지를 보냈는데, 항상 편지의 전달 여부를 물어 확인한 것으로 보아 당시 편지가 잘 전달되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사제(舍弟)로 되어있는데, 내용으로 볼 때 전남 창평에 있는 이승학의 동생인 이승구를 비롯한 동생들 모두에게 부친 것으로 보인다. 또 편지 끝부분이 잘려 마지막 인사말과 간지를 알 수 없는데, 내용으로 추정컨대 이 편지는 이승학이 과거 시험을 위해 서울에서 생활한 1890~1891년 무렵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