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열람
  • 디렉토리열람
  • 유형분류
  • 1850년 임계진(林啓鎭) 간찰(簡札)

1850년 임계진(林啓鎭) 간찰(簡札)

기본정보
· 유형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내용분류
· 작성주체 발급자 : 임계진(林啓鎭) / 수취자 : 종형(從兄)
· 작성시기 庚戌臘月十六日 (1850)
· 작성지역
· 형태사항 크기 : 26.0 X 42.0
· 소장처 현소장처 : 한국학호남진흥원 / 원소장처 : 나주 나주임씨 송파공 종중
· 참고문헌
  • 정의

    1850년 12월 16일에 종제(從弟) 임계진(林啓鎭)이 종형(從兄)에게 보내는 간찰(簡札).

    원문텍스트
    [미상]
    서로 헤어진 이후, 아득히 소식을 듣지 못하여 사모하고 답답한 마음 간절하였는데, 곧 황화점(皇華店)을 지나는 인편으로 인해서 보내주신 서찰을 받고서야 가셨던 길이 순탄하였음을 알 수 있었으니 마음에 위로가 되고 다행한 일입니다.
    인편이 떠난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세밑에 비와 눈이 더욱 자주 내리는데, 이에 따라 엎드려 여쭙건대, 부모님을 모신 나머지, 몸은 모두 평안하시며, 모든 권속도 다 안녕하십니까? 이러한 세밑을 당하여 공사간(公私間)에 많은 일의 독책이 반드시 몰릴 수밖에 없는 형편인데, 과연 어떻게 감당하고 지내십니까? 공연한 염려만 간절할 뿐입니다.
    종제(從弟)는 부모님의 건강에 큰 손상이 없으니 그지없이 다행한 일이나 안사람이 임신한 지 8개월인데 또 유산한 바람에 바라던 일들이 무너져버렸고, 또한 그날 죽음에서 보호할 수 없었습니다. 산모는 지금 7일이 되었으나 일어서지 못하니 아직도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저간에 걱정을 어떻게 모두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로부터 다시 아이를 기를 수 있는 희망은 사라졌고, 하나같이 갈수록 심하니 홀로 외로이 걷는 길 또한 이를 어찌해야 할지? 저교(楮橋)는 아무런 변고를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입니다.
    금산원님 홍열모(洪悅謨)는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고, 홍기섭(洪耆燮)은 해주 판관이 되었는데, 두 집안 사이의 세혐(世嫌)으로써 절로 교체될 것 같은 터라, 이 때문에 걱정입니다.
    전라도 관찰사는 이유원(李裕元)이 되었다 하고, 조영규(趙領揆)는 갑자기 죽었다고 합니다.
    내년에는 중전이 혼인한 지 50년이라, 봄 사이에 이를 경축하기 위한 과거가 열릴 것입니다. 그때 찾아뵐 것 같습니다.
    이는 모두 별도의 쪽지에 쓰여 있습니다. 잠시 격식을 갖추지 않고 답장을 올립니다.
    이를 적어 화정점(華亭店)에 보냈는데, 어느 때나 보실지 알 수 없습니다.
    경술 섣달 16일, 종제(從弟) 계진(啓鎭) 글을 올림

    동리공(東里公) 추향(追享)에 관한 의론과 홍송간(洪松磵: 洪天璟)을 추향(追享)할 때의 의절(儀節)은 자세히 살핀 후에 하나같이 이를 따라서 시행해야 할 일이니만큼 어찌 서원에 있는 옛 서적을 자세히 열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돈암서원의 통문을 얻기는 어렵지 않겠지만, 그 사이에 그곳 근자의 의론은 어떤지 알 수 없습니다. 아직 이런 일을 먼저 하지도 않고서 도회(道會)를 마련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만약 다른 일로 도회가 마련된 자리에서 이번 일을 함께 들어 말한다면 쉽게 이뤄질 것입니다. 오로지 이 하나의 일만을 위해서 도회를 마련하려고 한다면 실로 꼭 그렇게 된다고 기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황산서원의 통문은 비록 돈암서원처럼 쉽지는 않을 것 같으나, 만약 도회만 이룰 수 있다면 화양서원까지 함께한다는 것은 너무 장황하고, 노강서원은 뺄 수는 없겠지만, 단 주로 의거할만한 곳은 돈암서원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마땅히 새해 전에 이런 일을 도모하여 전주향교로 보내고, 또한 곧바로 나주로 보내고자 하지만, 이번 머나먼 길에 보낼만한 사람을 찾기 어려우니 이것이 걱정입니다. 일이 생각대로만 된다면 서울 종중에서도 또한 의당 2, 30금(金)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성균관의 통문은 아우가 비록 올라갈지라도 딱 부러지게 말하지 못할 것이니 나주 선비로서 성균관에 출입한 자만 못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조판서는 아무리 아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반드시 판결문을 허락하리라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며, 전라관찰사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다만 한 고을의 사론(士論)으로서 통한다면 어찌 이뤄지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추향할 적의 축문은 의당 함산림(咸山林)에게 받을 것이며, 도회(道會)는 성균관의 통문에 비하여 더욱 어려운 일이니 이 점을 헤아려서 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신흥동(新興洞)에서는 마땅히 성의와 역량에 따라 해야 할 일이지, 굳이 여기에서 권하여 서로 허락한 일로 기대할 것 아닙니다. 마땅히 편지가 있을 것입니다.

    종형님전 답서를 올림
    [미상]
    相別以後漠然無聞政切慕
    菀卽因皇華店過便伏承
    下札謹伏審
    行李利稅伏慰且幸便後有日
    雨雪歲暮益頻仍伏詢
    侍餘體度萬護渾節均寧
    否當此歲末公私之督勢所必至
    果何以堪遣耶伏切空慮而已從弟
    堂候無大損萬幸而室人懷胎八朔
    而又經産所望瓦解而亦不得保當
    日化去産母今至七日而不能起動尙
    未釋慮這間憂遑如何盡狀從今
    以産育更無望一與去甚單行亦
    復奈何楮橋無見故可幸錦伯洪
    悅謨爲之海伯洪耆燮爲之海判
    似有世嫌而自遞矣爲之悶歎完
    伯李裕元爲之云趙領揆卒逝云耳明
    年是慈殿舟梁五十載春間當有慶
    科其時似可得
    拜矣都在夾紙
    姑不備上謝禮
    書此送置華亭店未知何時
    當見達也
    庚戌臘月十六日從弟啓鎭上書
    東里公腏享之議洪松磵追享時儀節
    詳探然後可以一遵此爲之何不詳閱院中
    古蹟耶遯巖通章得之不難而其間未知
    那近議論之如何姑未爲之至於道會此非容
    易之事如或因他事道會而幷擧則易矣專
    爲此一事設會則實未可必矣黃山通章雖不
    如遯巖之容易亦可得會華陽則太張皇魯
    岡則不可無而但依據不如遯巖矣第當於此
    歲前圖得而送于全州校宮且欲直送于羅州
    而此則遠路專伻爲難是可悶也事如得諧則京
    宗亦當有二三十金之助矣泮通弟雖上去未可
    質言恐不如羅儒之出入者禮判雖知舊必無
    以得許題完伯亦然矣只以一鄕士論而爲之則
    豈有不諧之理乎追享時祝文當受於咸山
    林矣道會比泮通尤難下諒爲之如何新興
    洞則當隨意隨力而爲之非必待此中之勸疇相
    許當有書矣
    從兄主前上答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