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간에 소식이 가로막힌 지 어느덧 겨울이 되었습니다.
요사이에 고요한 몸은 평안하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러러 그리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족보 명단은 요사이에 모두 모아 베껴 쓰셨습니까? 반드시 원근의 지방에서 모두 한꺼번에 보내올 것입니다. 이러할 즈음에 가만히 앉아서 세월을 잘못 보낸다면 어느 날에 일을 시작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서두르심이 어떠하겠습니까?
우리 고을 정원면(定原面)에 거주하는 임대진(林大鎭)은 분명히 그 세파(世派)를 잘 알고 있으니 수단(收單)에 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말씀이 있기에 이 일로 그를 불러 같은 집안으로 대접하였으나, 그 후 서서히 염탐하여 보니 여기에는 매우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때마침 족보를 인쇄할 당시, 그 족보를 위로 거슬려 살펴보니, 을묘식(乙卯式) 족보에 임계춘(林啓春)은 임대진(林大鎭)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 아버지 처인(處仁)은 지원(智遠)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본관은 금성(錦城)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임자년과 기유년에 간행한 두 족보에는 처인(處仁)과 계춘(啓春)으로 기록되어 있고, 본관은 조성(兆城)이라고 합니다. 이는 본래 보성 임씨였다가 중간에 금성 임씨로 바뀐 것입니다. 이는 근래에 들어 남의 본관으로 족보에 올리는 유로서 풍화(風化)에 관계되는 바 큽니다. 이처럼 쉽게 알 수 있는 자를 참으로 우리 같은 임씨로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회진(會津)은 여기와의 거리가 조금 멂으로써 찾아가 모두 말씀드릴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때문에 서신으로 말씀드립니다. 만약 혹 명단을 거둬들였으면 그 사람을 빼는 이외에도 불분명한 자 또한 준엄하게 한계를 세워서 젊은이들이 경계하고 조심하도록 하고, 족보에 뒤섞이지 않도록 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족제(族弟)는 찾는 사람이 없는 서재에서의 삶은 갈수록 더욱 쓸쓸하기만 하니 가련함을 어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인편으로 인하여 이를 생략하고 격식을 갖추지 않고 올립니다.
지원(智遠)의 부친은 동수(東秀), 조부는 성립(省立), 증조는 두남(斗南)입니다.
그들의 가까운 일가는 모두 본관이 조성(兆城)이었는데, 을묘년 족보부터 금성(錦城)으로 바꿨습니다.
기미 10월 11일, 족제 한호(漢浩) 두 손 모아 절하고 올림
송파(松坡) 족제(族弟) 흥적(興謫) 상후서(上候書)
임생원댁(林生員宅) 즉납(卽納) 생식(省式) 근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