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 10월 21일, 송인복(宋麟福)과 송인서(宋麟瑞)가 우리 집안 선산 시중도(侍中島) 백호(白虎) 내, 일찍이 파냈던 자리에다가 그 조부를 몰래 안장함으로써 산지기가 달려와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때문에 30일에 모든 일가가 모여 회의할 때, 본관은 순천 습조서(習操所)에 있었다.
11월 초7일, 관아에 올려야 할 뜻을 상의하였고, 또한 장계(狀啓)를 써놓고 기다렸는데, 초5일에 류광인(柳匡仁)이 문중에 알리지도 않고 곧장 그 스스로 파내버렸다. 이는○…○ 족제(族弟) 류광열(柳匡烈)씨의 사주에 의한 것이다.
그 뒤에 듣자니 류광재 또한 이 사실을 알았으며, ○…○ 류광인은 자수하였고, 류인서 또한 자백함으로써 법률에 따라 정배(定配)되었으나, 일흔 넘은 고령이라고 하여 속죄금을 바치는 데 그쳤다.
당시 감사는 박기수(朴綺壽)이며 당시 본관은 조경진(趙璟鎭)이다. 류인서는 또한 사주했다는 뜻으로써 의논을 올려 광열(匡烈), 직효(稷孝), 광모(匡模) 세 사람을 압송하여 한 차례의 형으로 추국(推鞫)한 후 내보냈고, 의송(議送)주 1)의 판결문에서 말하기를, "위장(慰狀)이란 어버이를 위한 마음이다."라고 하였다.
을유년 봄여름에 피차 연결되어 본관에 올렸고, 겸하여 영문에 올렸다. 본관과 영문에서는 모두 옮기라는 ○ 판결문이 있었고, 또한 그를 대놓고 꾸짖었으나 끝내 파내어 옮기지 않고, 파헤쳐진 그 곁에다가 초빈(草殯)을 마련하였다.
3월 감사 조봉진(曺鳳振)으로부터 8월 초6일에 이르기까지 또다시 옛 천광(穿壙)의 한 자 거리의 땅에 몰래 안장하였다. 당시 본관이 서울을 올라간 까닭에 감영에 이 사실을 올리자, 그 판결문에서 "갈수록 더욱 패악이 심하니 참으로 또한 지루하다. 송인서는 엄히 구속하고 감독하여 파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낙안군으로 옮겨 구금하였다.
10월 17일에 이르러 본관이 도형을 들고 찾아와 ○…○. 당시 송인서가 내응하였다는 설을 퍼뜨린 자가 류광모였다. 본관 또한 말하기를, "한 번도 송사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공사(公私)로 헤아려 보면 그 일은 매우 타당하지 못하다. 이 때문에 처음 도형에 표시된 곳 ○. 여러 일가 가운데 패악을 한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유광인이 있던 방으로 여러 사람을 불러들여 류광인과 함께 말하기를, "영문(營門)에서 이미 감독하여 파내라는 판결문이 있다."라고 말하였고, 본관이 여러 차례 옮겨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하물며 지금 도형으로 ○ 옮긴다는 뜻은 어찌 굳이 깜짝 놀라고 패악의 일이라 하겠는가? 관에서 한 차례 파낸 것이 어찌 사적으로 1백 번 파낸 것보다 더 낫지 않겠는가?
또한 고을 사람과 사방 이웃에서 이러한 말을 듣는다면 어찌 우리를 꾸짖지 않겠는가? 결코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자, 류광인 또한 옳다고 하였으며, 족형 직효(稷孝) 또한 옳다고 하였다. 또 류광인이 그 묘막(墓幕)을 부수고자 하자, 직효가 말하기를, "무덤을 파내면 묘막도 버릴 것인데, 어떻게 굳이 묘막을 부수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 아주 옳고 옳다."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