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한 나머지 문득 보내주신 답장을 받고서 삼가 문서에 보여주신 바를 살펴보았습니다. 고종 5년 무진(1868)에 제동사(齋洞祠)는 훼철(毁撤) 대상이라는 명에 받았으나, 보성 사는 사람으로 벼슬한 송씨가 있었는데, 그가 대신에게 주선을 부탁하여 훼철하지 않아도 된다는 명을 얻어, 남들보다 뒤늦게 훼철됐다고 말합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재동서원의 칙명과 전라도 관찰사의 게판(揭板)하라는 감결(甘結)주 1)의 공문서가 내렸습니다. 그러나 송씨 외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사첩(史牒)에 실렸는지 않았는지 또한 알 수 없습니다.
충정공(忠正公) 주벽(主壁) 운운은 전해오는 말이나 단 2월, 8월의 춘추 향사[兩丁]의 축문에서 "도를 수호하고 강륜을 부지하였으며, 의를 밝히고 인을 이뤘으며, 십실(十室)의 충현으로서 일체로 정성 들여 제사 올린다."고 하니 주벽 여부가 의심스러운 일이며, 사적으로 말하면 이 축문은 충정공에 해당한 것인데, 송씨들이 이 축문을 사용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어우공(於于公: 柳夢寅)의 추향(追享)은 정조 23년 기미(1799) 있었던 것으로, 이는 신원(伸冤) 후의 일입니다. 계해년에 또 시중공(侍中公) 송인순(宋寅純)을 추향하였고, 임진년에 또 송암공(松庵公) 절도사 정걸(丁傑)을 추향하였고, 무술년에 또 원산 정덕주(圓山丁德輖)를 추향하여 매 신위(神位)마다 각기 다른 축문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살펴보면 일자형 연벽(連壁)처럼 보이는데, 이 또한 의심스럽습니다.
우리나라 『원우록(院宇錄)』을 살펴보면, 사액(賜額) 여부로 위패의 차례를 삼지 않고, 사우(祠宇)의 건립 연대로 차례를 정합니다. 설령 훼철하지 않아도 된다는 명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앞자리에 모실 수 있겠습니까? 오직 현명한 사촌은 이러한 점을 헤아려 서둘러 통문을 지어 보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머지 답장의 격식을 갖추지 않고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