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의 2년 동안 노년의 깊은 우의를 맺어 병든 몸을 부여잡고 돌아올 적에 갑자기 별장(別章: 이별하면서 주고받는 글)이 도착하여 두세 차례 받들어 읽노라니 나도 모르게 스스로 마음이 허전하면서 서운한 감회가 깊습니다. 곧 인편으로 인하여 대략이나마 생활하시는데 평안하다는 말을 들어, 그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서신을 받은 후로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모든 생활은 또한 어떠하십니까? 우러러 위로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저는 병중에 길을 떠나 어렵사리 영문(營門)에 도착하여 원님을 찾아뵈자, 도리어 너그럽게 대접해주어 부끄러움과 한탄의 마음 이길 수 없습니다. 아직도 노독(路毒)이 풀리지 않은 터라, 그 당시 이별의 글을 바로 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송구함과 한심스러움을 어찌 다할 수 있겠습니까?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온 뒤에 서울을 올라가려 생각하지만, 세상사란 기필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여 보면 반드시 몇 년 안에 마땅히 순천이나 낙안 지방 등에 자리를 얻어 다시 그대를 받들고서 단란한 이야기 자리를 마련한다면 이 어찌 한 차례의 귀한 만남이 아니겠습니까? 껄껄 웃을 일입니다.
귀 향교에 백동(百銅)을 냈다는 일은 집강(執綱)과 여러 사림(士林)이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완문(完文)에 의하여 시행한다면 십년 후에 마땅히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있을 것이니 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먼 고을 사람들의 마음이란 의례 사람이 떠나간 후에 남들 비아냥거리기를 잘하는데, 제가 돌아온 뒤 또한 이러한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향소(鄕所)에서의 자리다툼은 선비들에게 있어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이에 관한 말은 말하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나머지 모든 일은 뒤이어 말씀드릴 것이기에 격식을 갖추지 않고 글을 올립니다.
계사 7월 13일, 기하(記下) 박재관(朴哉寬) 두 번 절하고 올림
금섬류(金蟾留) 완도류객(完東留客) 근후장(謹候狀)
류생원(柳生員) 여안(旅案) 집사(執事) 입납(入納) 근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