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열람
  • 디렉토리열람
  • 유형분류
  • 1913년 류영의(柳永毅) 등 간찰(簡札)

1913년 류영의(柳永毅) 등 간찰(簡札)

기본정보
· 유형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내용분류
· 작성주체 발급자 : 류영의(柳永毅)
· 작성시기 癸丑十二月六日 (1913)
· 작성지역
· 형태사항 크기 : 18.3 X 60.8
· 소장처 현소장처 : 한국학호남진흥원 / 원소장처 : 고흥 고흥류씨 충정공(류탁) 후손가
· 참고문헌
  • 정의

    1913년 12월 6일에 류영의(柳永毅) 등이 종인(宗人)들에게 보낸 간찰(簡札).

    원문텍스트
    [미상]
    나주군(羅州郡) 죽포(竹浦) 홍화동(紅花洞)
    여류(旅留) 근배(謹拜)○

    첨좌하(僉座下) 상후서(上候書)

    한 해가 저물어가는데 여러 존귀한 몸은 한결같이 모두 진중하십니까? 엎드려 그리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저희는 객지에서 그저 편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 파의 명단을 교정하는 사이에 간혹 잘못된 부분이 있고, 또한 족보에 빠진 부분이 두 곳이나 됩니다. 그 가운데 한의(漢儀)와 한원(漢源)은 뒤에 편수할 족보에 넣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서글픈 마음입니다.
    달순(達順)의 일 또한 발각되었습니다. 이는 덕근(德根), 희성(喜星), 쌍용(雙龍) 세 사람의 부탁에 의한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서사(書士)가 서자(庶子)를 표시하는 '서(庶)' 자를 쓰지 않았다."라고 핑계를 대면서 몇몇 사람의 입을 막고자 하였으나, 훗날 이러한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의 자손들에게 또한 뇌물을 쓴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미적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다가 영길(永吉) 모친의 나이와 자식의 나이가 두서없이 서로 어긋나는 자리에, 쌍용이 그 곁에 있으면서 뚜렷하게 말하여, 다시 '서(庶)' 자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어찌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모든 일에 생색을 낼 수 없으니 저희 면목이 없을 뿐 아니라, 한 집안이 수모당할 일을 뭐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머지는 모두 움츠린 채, 안부의 격식을 갖추지 않고 올립니다.
    계축 12월 6일, 영의(永毅)
    중섭(重燮)
    중헌(重憲) 절하고 올림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보소(譜所)에 종이가 부족하여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마땅히 그 동정을 살펴서 내려오셨으면 생각합니다.

    세모(歲暮)가 바짝 다가온 날에 모든 존귀한 몸은 두루 평안하십니까?
    저희는 객사에서 잠자고 먹는데 아무런 탈이 없으나, 타향 길은 참으로 괴로워 발에 온통 물집이 잡혀 비틀거리면서 여러 날을 허비하고 지난 그믐에야 겨우 보소(譜所)에 들어와 상황을 살펴보니 중계(中系)는 벌써 간행하였고 하계(下系)는 바야흐로 작업 중입니다.
    이 때문에 중계는 더 이상 고증할 수 없었으나 하계를 고증한 여가에 중계를 간간이 살펴 사이에 끼워놓은 15장을 살펴보았고, 그 나머지는 알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 일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보소에서는 혹 명단을 너무 늦게 보냈기 때문이라고 그 책임을 돌려 말하고 있으나, 그들의 동정을 살펴보니 예전의 명단을 기꺼이 드러내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을 헤아려 주십시오.
    서파(西派)의 학영(學榮) 사손(祀孫) 부분에 대해서는 이번 족보의 규례(規例)란 『가례(家禮)』의 조묘(祖廟)에 반부(班祔)하는 의의에 따라 결정하였고, 이전에 제정된 법규는 매우 아름답지 못한 터라, 그 당시 중교(重敎)씨 또한 "좋지 못하다."는 의견을 담아 서찰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조정으로 오르내린 까닭에 경호(敬浩)를 학영(學榮)의 뒤를 이은 후손으로 썼습니다.
    여러 종친의 말은 안으로는 비록 예법에 구애받는 부분이 있으나 그 일은 방편으로 중도를 얻었습니다. 저희는 경솔하게 이렇게 일을 끝마쳤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헤아리시어 허물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성운(聖云)에 관한 일은 그 교정 이후로 아무개, 아무개 사람이 조용히 말하고 있으니 없는 듯이 호도하여 감추는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격식을 갖추지 않고 존귀하신 분께서 살펴주시기를 생각하며 글을 올립니다.
    계축 12월 2일, 등 영의(永毅)
    중섭(重燮)
    중헌(重憲) 절하고 올림


    [미상]
    羅州郡竹浦紅花洞
    旅留謹拜▣

    僉座下上候書
    伏未審歲暮
    僉尊氣體候一向萬重伏
    溯區區不任下悰之至等客味
    姑安耳就白吾派單校正間
    間有覓疵且至於漏譜者二
    十處也其中漢儀漢源以追
    譜爲言難以說明嗟將奈何
    達順事亦爲發覺知是德根喜
    星雙龍三人之囑託也姑說書
    司不着庶字欲防若干人口恐
    □(後)後見露欲其承嗣亦似納賂
    故猶豫未決至於永吉母
    年子年無倫相支之席雙
    龍在傍說其現然□□□□(反而思之)更着庶字
    此亦無可奈何反而思之凡百
    作爲沒色不啻鄙等之無
    顔一門之見侮何可形喩
    餘都縮不備候禮
    癸丑十二月六日永毅
    重燮
    重憲拜上
    追譜所有紙乏似有掇役
    從當觀其動靜下來伏計


    伏未審歲暮紙薄
    僉尊體候萬安否等旅館
    眠食無頉而客行良苦足繭
    彳亍費了多日前晦僅入譜所
    觀光則中系已刊下系方有事故
    中系姑未考証而下系考証之暇
    中系間間涉察間張十五其餘姑
    未知此事難堪譜所或說歸責
    於納單遲晩觀其動靜故單則
    不肯見露以此諒之而至於西派
    學榮祀孫今番譜規依家禮
    班祔祖廟之義作定而前規不
    克甚美其時重敎氏亦以不好
    有書云云多般升降故以敬浩
    繼后于學榮則僉宗言內雖拘禮
    法事權得中鄙等妄率竣事
    諒此事機幸勿咎焉且聖云事
    其校正以下某某人從容說話則乃
    似萬無暗然塗之耳餘不備伏
    惟尊察上狀
    癸丑十二月二日等永毅
    重燮
    重憲拜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