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군(羅州郡) 죽포(竹浦) 홍화동(紅花洞)
여류(旅留) 근배(謹拜)○
첨좌하(僉座下) 상후서(上候書)
한 해가 저물어가는데 여러 존귀한 몸은 한결같이 모두 진중하십니까? 엎드려 그리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저희는 객지에서 그저 편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 파의 명단을 교정하는 사이에 간혹 잘못된 부분이 있고, 또한 족보에 빠진 부분이 두 곳이나 됩니다. 그 가운데 한의(漢儀)와 한원(漢源)은 뒤에 편수할 족보에 넣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서글픈 마음입니다.
달순(達順)의 일 또한 발각되었습니다. 이는 덕근(德根), 희성(喜星), 쌍용(雙龍) 세 사람의 부탁에 의한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서사(書士)가 서자(庶子)를 표시하는 '서(庶)' 자를 쓰지 않았다."라고 핑계를 대면서 몇몇 사람의 입을 막고자 하였으나, 훗날 이러한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의 자손들에게 또한 뇌물을 쓴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미적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다가 영길(永吉) 모친의 나이와 자식의 나이가 두서없이 서로 어긋나는 자리에, 쌍용이 그 곁에 있으면서 뚜렷하게 말하여, 다시 '서(庶)' 자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어찌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모든 일에 생색을 낼 수 없으니 저희 면목이 없을 뿐 아니라, 한 집안이 수모당할 일을 뭐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머지는 모두 움츠린 채, 안부의 격식을 갖추지 않고 올립니다.
계축 12월 6일, 영의(永毅)
중섭(重燮)
중헌(重憲) 절하고 올림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보소(譜所)에 종이가 부족하여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마땅히 그 동정을 살펴서 내려오셨으면 생각합니다.
세모(歲暮)가 바짝 다가온 날에 모든 존귀한 몸은 두루 평안하십니까?
저희는 객사에서 잠자고 먹는데 아무런 탈이 없으나, 타향 길은 참으로 괴로워 발에 온통 물집이 잡혀 비틀거리면서 여러 날을 허비하고 지난 그믐에야 겨우 보소(譜所)에 들어와 상황을 살펴보니 중계(中系)는 벌써 간행하였고 하계(下系)는 바야흐로 작업 중입니다.
이 때문에 중계는 더 이상 고증할 수 없었으나 하계를 고증한 여가에 중계를 간간이 살펴 사이에 끼워놓은 15장을 살펴보았고, 그 나머지는 알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 일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보소에서는 혹 명단을 너무 늦게 보냈기 때문이라고 그 책임을 돌려 말하고 있으나, 그들의 동정을 살펴보니 예전의 명단을 기꺼이 드러내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을 헤아려 주십시오.
서파(西派)의 학영(學榮) 사손(祀孫) 부분에 대해서는 이번 족보의 규례(規例)란 『가례(家禮)』의 조묘(祖廟)에 반부(班祔)하는 의의에 따라 결정하였고, 이전에 제정된 법규는 매우 아름답지 못한 터라, 그 당시 중교(重敎)씨 또한 "좋지 못하다."는 의견을 담아 서찰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조정으로 오르내린 까닭에 경호(敬浩)를 학영(學榮)의 뒤를 이은 후손으로 썼습니다.
여러 종친의 말은 안으로는 비록 예법에 구애받는 부분이 있으나 그 일은 방편으로 중도를 얻었습니다. 저희는 경솔하게 이렇게 일을 끝마쳤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헤아리시어 허물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성운(聖云)에 관한 일은 그 교정 이후로 아무개, 아무개 사람이 조용히 말하고 있으니 없는 듯이 호도하여 감추는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격식을 갖추지 않고 존귀하신 분께서 살펴주시기를 생각하며 글을 올립니다.
계축 12월 2일, 등 영의(永毅)
중섭(重燮)
중헌(重憲) 절하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