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전 글을 올립니다.
떠나올 적 찾아가 절을 올리지 못하였고 또한 가르침을 받들지도 못했습니다. 슬픈 마음은 밤낮으로 그칠 줄 몰라 밤이면 꿈속에서 생각하고 낮이면 찾아가 뵈려고 생각하오나 다만 가뭄이 더욱 심하여 농지에 파종을 못한 까닭에 오히려 찾아뵈려는 마음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숙질의 정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3월 초, 통오(通吾)가 오는 편에 대략이나마 당숙의 몸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번갈아 전해 들려오는 참상과 진천 고을로 유배지가 옮겨진다는 말들은, 나이 드신 예순 노인에게 있어 이 무슨 꼴입니까? 당질의 답답하고 한심스러운 마음을 말할 수 없습니다.
아! 저 류광재는 편안하게 세상에 살아 있으니 이보다 분통 터질 일이 없기에 이를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3월 29일 서신과 4월 13일, 그리고 21일에 보내주신 서신을 연달아 받았습니다. 규복(圭復)은 당숙의 앞에서 가르침을 받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 후로 여러 날이 흘렀는데 이처럼 혹독한 무더위에 객지에서 몸은 어떻게 감당하고 계십니까? 엎드려 사모하는 마음 그지없어 필설로 모두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당질은 그럭저럭 평안하게 부모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는 다행한 일이지만, 가뭄에 큰 시름으로 지내고 있으니 걱정되는 마음을 어떻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당숙님의 큰집과 작은집의 논은 진작 파종을 끝마쳤고 지금까지 논이 마르지 않으니 아주 다행하고 다행한 일입니다. 올 보리농사는 거의 흉년에 가깝습니다. 이 때문에 보리로 돌려막을 돈을 1냥 6전으로 시행한다고 하지만, 이제부터 다가오게 될 앞날은 몇 냥이 될 줄 모르겠습니다.
조복(兆福)의 신병은 전염병이 돈 후에 쾌차하여 그 형이 찾아와 그와 함께 떠났습니다. 이 달 11일에 들어와 며칠 머물 적에 병의 증세를 살펴 알아보니 간혹 약간의 통증이 있기는 하나 얼굴 기색은 완전한 사람 모양새니 바라건대 염려하지 마십시오. 문출(文出)과 우옥(又玉) 또한 별일이 없습니다.
며칠 전 통오(通吾)가 들어와 그가 보여준 서신을 살펴보니, 저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자주자주 서신을 가지고 간 자에게 서신 부치는 게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이처럼 얼렁뚱땅 넘긴다."라고 하시기에, 정신을 차리고 말씀드리기를, "깜빡 잊고서 미처 올리지 못했습니다."라고 여쭈자니 매우 황송스러워 몸 둘 바 없습니다. 다만 외진 곳이라 인편이 없어 서신을 전달할 수 없었음을 아실 것이기에 오히려 서신을 올리지 못한 터라, 죄송하고 죄송합니다. 이후엔 자주자주 서신을 부칠 생각입니다.
담록(談祿)과 수증(壽增)은 장가들지 못했고 당숙께서 방면되어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울에 있는 주인이 지난번 통오를 만나 아주아주 부탁하자, 그 또한 귀담아듣고서 머지않아 올라가겠다고 말하였으니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3월에 보낸 서신의 말미에 2구의 시가 있었는데, 그 시를 보노라면 사람들의 슬픔을 자아내는데, 당질의 마음이야 어떻겠습니까? 나머지 모든 일은 다만 객지에서 기력을 십분 너그럽게 지니시어 상심하시는 일이 없으시고 가까운 날에 방면되시기를 바랍니다. 격식을 갖추지 않고 이만 줄이면서 엎드려 살펴주시기를 생각합니다.
병술 5월 그믐, 당질 서호(瑞浩)는 삼가 두 번 절하고 글을 올립니다.
덧붙여 번거로이 말씀드리고자 함은, 4월 초 류광인(柳匡仁)이 죽었고, 이달 점암(占巖) 족숙이 서편 신정(新亭)의 족숙과 당동(堂洞) 족장의 초상이 났고, 풍안 망동(豐安望洞) 아저씨는 3월 초에 맏아들의 초상을 당하여 참으로 슬프고 슬픈 일이나, 가까운 여러 집안은 아무런 일이 없습니다.○ 이달 초, 수이(壽而)씨가 우리 집안 사액(賜額)을 청한 일로 서울로 올라갈 당시, 진잠(鎭岑)을 들렸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매우 기쁜 마음에 서신을 보내면서 겸하여 해산물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길을 떠나 큰 강에 이르러선 더 이상 길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원산(圓山)의 7촌 남양(南陽) 족숙이 금성천총(金城千摠)에게 보낼 서신과 해산물을 용전(龍田)에 버린 채, 이곳으로 찾아왔습니다. 이 또한 아들과 조카들에게 큰 불행입니다. 이찬(而贊)이 송인서(宋仁瑞)와 함께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 훗날 서신을 부칠 적에 재종조부 앞으로 서신을 보내주시길 엎드려 바랍니다.
○ 낙안에서 길을 떠날 적에 송계일(宋啓日), 김한걸(金漢傑), 박상현(朴相賢), 송기렴(宋基濂), 장석규(張錫圭) 등에게 각기 2전(錢)씩 걷어 모두 1냥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적어 류천총(柳千摠)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류천총이 도중에 소식을 물어오면 통오(通吾)에게 가져다드리려고 합니다.
○ 송인서(宋仁瑞)가 지난달 내려와 류직효(柳稷孝)와 류광재(柳匡梓)를 압송할 뜻을 신임 원님에게 알렸지만, 신임 원님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도리어 그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아들과 형의 뼈는 현재 파낸 곳에 매장했다고 합니다. 그 조부가 4월에 동면(東面)에 안장했습니다. 남이형(南履炯)은 남이익(南履益)과 6촌인데 그의 행정은 매우 매서우며, 구관(舊官)인 집의(執義)는 올라갔습니다.
○ 4월 초사흘에 비가 내렸고 보름 사이 적은 비가 내렸고, 이달 초9일 적은 비가 내렸고, 26일 밤비는 먼지를 적실 뿐이었으며, 오륙일에는 비가 내리려다가 비가 내리지 않았고 흥양과 도양(道陽)은 가뭄이 더욱 심하며, 그다음으로 고읍(古邑) 남서지방, 대서읍내(大西邑內) 두원면(豆原面) 등은 모내기 못 한 논이 4분의 1이고, 호산과 당산 뜰 20여 두락에 모내기 못한 논, 그리고 마르진 않았지만 모내기하지 못한 논에 다시 모를 심기 어려우니 그저 탄식만 나올 뿐입니다.
○ 교임(校任)은 정만제(丁萬濟), 송양희(宋陽煕), 류재영(柳載榮), 송두환(宋斗煥), 신경모(申璥模)이며, 운곡서원 원임은 송사일(宋師一), 류택영(柳宅榮), 고(故) 신진록(申震祿), 송규흠(宋奎欽), 송경(宋璟)입니다.
○ 좌수(座首)는 송인보(宋麟輔)며 이방(吏房)은 신복조(申福祚)입니다.
○ 양리(楊里) 이씨(李氏)의 선산에 관한 일은 고을의 한 차례 회합에서 곧바로 선조 사모한 일을 허락하니 깜짝 놀랄 일이 이보다 더한 게 없습니다. 이 모임에 온 고을 노소가 모두 모였는데, 수이(壽而)씨만 유독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 환일(煥日)이 5월에 가겠다는 것은 기약하기 어렵습니다.
○ 문중에서 한 번도 유광재에 관한 논의가 없으니 더욱 분하고 분한 일입니다.
책실(冊室)주 1)을 함께 맞이하자는 일은 말씀하신 네 사람이 모두 집안을 잊지 못한다는 이유로 가지 않았습니다.
○ 지난날 수이(壽而)의 인편에 보내온 서신 뜻을 학경(學卿)에게 말했는데, 이전의 서신에 대해 답하지 않았고 요즘 서신을 보내어 묻지도 않는다고 말한 까닭에 서로 크게 싸웠다고 합니다.
○ 통오(通吾)와 조복(兆福)이 이달 26일에 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