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문
우리 규정공(糾正公)은 바로 12대 중조(中祖) 중에 가장 저명한 조상입니다. 선현의 학통을 이어 후학의 길을 열어준 공로는 역사에 뚜렷하게 나타나니,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누군들 그 덕을 숭상할 줄을 모르겠습니까. 더구나 그 뒤를 계승한 훌륭한 후손이 계속해서 서로 이어져서 청재공(淸齋公, 박심문(朴審問, 1408~1456))·공간공(恭簡公, 박건(朴健))의 맑은 풍모와 높은 절조, 송당(松堂, 박영(朴英, 1471~1540))·강수(江叟, 박훈(朴薰, 1484~1540))·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1507~1581))·관원(灌園, 박계현(朴啓賢, 1524~1580))·겸재(謙齋, 박성원(朴聖源, 1697~1767)) 다섯 선생의 문학과 시호와 성리학은 완연히 우리나라의 오백 년 동안 문(文)을 높인 스승이 됩니다. 숙민공(肅慜公, 박승종(朴承宗, 1562~1623))이 위난을 겪은 뒤 나라에 충성하고 도를 지킨 현조(顯祖)의 풍성하고 위대한 공적을 어찌 하나하나 모두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11세손 우리 동계(東溪, 박은춘(朴殷春, 1544~1598))·매헌(梅軒, 박응수(朴應秀, 1566~1598)) 두 선조에 이르러서는 부자가 모두 임진왜란의 변란에 순직하였으니, 충과 효를 온전히 겸비하여 이미 한 고장 사림의 추천을 받고 세 선조를 올려서 봉암사(鳳巖祠)에서 제향하였으니, 당시 사대부와 선비들이 존경하고 숭상한 의리가 극진합니다. 이는 또한 족조 송탄공(松灘公)이 고심하고 피눈물을 뿌린 정성이 아니겠습니까.
고종 경오년(1870) 이후에 제사의 예절이 한결같이 폐지되었으니, 자손들이 한을 머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많은 선비가 울분을 토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해가 지난 뒤 향의(鄕議)가 크게 일어나서 한 방에 한 분을 제사 지내는 의리를 추진한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아직 결행하지 못했습니다. 이를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희 족종이 참람된 줄도 모르고 보잘것없는 힘으로 부질없이 허튼 생각을 자아내어 추후에 회복시키는 의례를 거행하였습니다. 비록 공적을 드러낼 준비를 마쳤지만, 오늘날 천하에 일이 많아 갈옷을 입고 유리를 잡은 선비들이 모두 입과 혀를 닫고 있어서 한목소리로 우러러 호소할 데가 없으니, 제향의 절차를 어찌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온갖 방법으로 일에 힘을 쏟고 있는데, 모두 사부조(私不祧)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통고합니다.
살피건대, 우리 종인들은 저마다 우리 중조(中祖)의 혈속(血屬)이라는 긍지를 가져 마음을 다해서 성의를 내어 제사의 의식을 돕는다면, 우리 종친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세도를 위해서도 다행일 것입니다. 바라건대, 여러 높으신 종인께서는 거리를 따지지 말고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서 우례(優例)로 의금(義金)을 내신다면, 응당 재실의 벽에 현각(懸刻)하여 남긴 향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선조의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깊이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신라(新羅) 기원 1992년 7월 모일
임원록(任員錄)
도유사 박중구(朴仲球), 부유사 박준정(朴準珵)·박재빈(朴在彬)·박형제(朴炯悌)·박인빈(朴仁彬), 총무 박영석(朴永碩)·박형득(朴炯得), 공사원 박장근(朴章根)·박형래(朴亨來)·박형현(朴炯現)·박봉규(朴鳳奎)·박형규(朴亨奎)·박병옥(朴炳沃), 감독 박준석(朴準錫)·박정주(朴晶柱), 장재(掌財) 박형일(朴炯日)·박형호(朴炯浩), 사서(司書) 박준탁(朴準鐸), 외무 박채주(朴采柱)·박종주(朴宗柱)·박형복(朴炯福)·박형찬(朴炯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