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고종20) 4월일에 전라도(全羅道) 영광(靈光) 화민(化民) 정희조(鄭羲朝) 등이 상주목사(尙州牧使)에게 성석찬(成錫瓚)이 투장한 묘를 파내어 가도록 엄한 처분을 요청하며 올린 상서(上書)이다. 자신들의 13대조 부정공(副正公)의 묘소가 화서면(化西面) 제궁동(齊宮洞)에 있어 산지기를 두고 수백 년간 금양수호(禁養守護)하였다. 그런데 산 아래 사는 성재문(成在文)이 그 아버지를 투장(偸葬)하여, 소장을 올려 굴이(掘移)하라는 관의 제음(題音)과 굴이를 약속하는 다짐과 수기를 받았음에도 한미하고 멀리 떨어져 사는 저희를 멸시하여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시간을 지체하다가 죽어버렸다. 그런데 그의 조카 성석찬(成錫瓚)이 삼촌의 약속을 이행하려고 하지 않고, 또 무덤을 투매(偸埋)하여 쌍분(雙墳)이 되었다. 이에 전후 판결문과 도형, 납고(納侤), 수기(手記) 등을 점련하여 올리니 성석찬을 관정에 잡아다가 엄히 다스리고 투매한 2총은 즉시 굴이하도록 요청하였다. 상주목사는 4월 5일에 도형을 그려오라는 제사를 내리며 장교(將校) 윤광칠(尹光七) 고(告) 이동수(李東秀)에게 담당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