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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재 정개청 선생에게 올린 편지【1577년 7월 24일 당시 공의 나이 21세였다.】(上困齋鄭先生書 【丁丑七月二十四日○時公年二十一】)
금성삼고(錦城三稿) / 금봉습고
곤재 정개청 선생에게 올린 편지【1577년 7월 24일 당시 공의 나이 21세였다.】
황면재(黃勉齋)주 46)는 자신의 스승 주자(朱子)의 상(喪)을 당하여 조복에 마질(麻絰)까지 가하였는데주 47) 제도는 심의(深衣)주 48)와 같았고 관질(冠絰)을 착용하였습니다. 왕백(王栢)주 49)은 자신의 스승 하기(何基)주 50)의 상에 심의를 입고 대질(帶絰)주 51)을 두르며 관(冠)에 사무(絲武)를 더하였습니다. 왕백이 죽자 그의 제자 김인산(金仁山)주 52)은 백건(白巾)에 수질(首絰)을 더하였는데, 수질은 시마복(緦麻服)주 53)과 같이 하고 소대(小帶)는 가는 모시 베를 썼습니다.주 54) 황면재, 왕백, 김인산 세 군자는 모두 주자 문하의 적통이었으나 스승을 위해 조복을 입는 결정에 조금씩 다른 부분이 없지 않았으니, 무엇으로 준거를 삼아야 하겠습니까? 또 스승을 위하여 삼년상을 지냈는데 그들은 관직을 떠나지 않았습니까?
도사(都事) 김천일(金千鎰)주 55) 문인들의 말을 들으니 "선생께서는 지금 일재(一齋)주 56) 【이항(李恒)】의 상을 만났으나 이미 조정에 몸을 바쳤기에주 57) 관직을 떠나지 못한다."라고 하였는데 제 생각에는 매우 편치 않아 바로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군자는 연고가 있으면 있는 곳에 따라 당시의 일에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까? 옛날 공자(孔子)의 문하에는 오직 안연(顔淵)과 민자건(閔子騫)만이 벼슬을 하지 않았는데, 공자께서 돌아가시자 칠십 명의 제자들이 집을 짓고 삼년 상 치르기를 마치 아버지 상을 치르는 것처럼 하였으나 복은 입지 않았으니 칠십 명의 제자는 예를 아는 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또 몸소 최마복(衰麻服)주 58)을 입지는 않으나 마음에는 슬퍼하는 감정이 있어서 마치 부모를 잃은 것 같은 뜻과 정자(程子)가 말한 바 안연과 민자건 같은 사람은 공자에 대해서는 비록 참최(斬衰)주 59)를 삼년 간 입더라도 괜찮다고 했던 뜻을 미루어 보면 진실로 평소 스승을 섬기는 은혜와 의리가 모두 지극하니, 삼년 간 관직을 떠나는 것이 비록 《예경(禮經)》에 실려 있지는 않았더라도 마땅히 행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김천일의 문하에서 저를 꾸짖고 책하는 비방이 많으니 매우 우습고 우습니다.
도사 김천일과 함께 한 성(城)에 있어 본래 전부터 알고 지냈는데,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이항 선생에게 수학하여 총명하고 언변이 좋았기에 세상의 중망을 받아 천거되어 이름난 관리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항 선생이 돌아가시자, 비록 초상에 달려왔다고는 하지만 한 번 조문한 뒤로는 장례의 일을 조치하지 않고, 집에 돌아가서는 요를 여러 겹으로 깔고 앉아서주 60) 관의 지공(支供)을 받고 빈객들을 응접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스승이 살아 있을 때는 달려가서 잘 모셔 명성을 낚는 미끼로 삼고, 돌아가시자 마침내 등을 돌려 배신한 것입니다. 저는 강직한 성미로 강개한 마음을 많이 표출하고, 그의 문인들과 극언으로 변론하며 간간히 거칠고 난폭한 기운을 분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김천일 문하에서는 방문한 향인(鄕人)에게 드러내어 말하지 않겠다고 깊이 생각하였다고들 하니, 말세의 교묘하고 험한 인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소견이 과연 의리의 정당함에 부합합니까? 바라건대 또한 살펴봐 주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주자께서 연평(延平)주 61) 선생의 상(喪)에 복(服)을 입지 않고 조정에서 토론하셨다는데 그러합니까? 또한 가르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이에 곡절이 많이 있었으나 이 사람의 행사가 뜻밖에 나오고 날까지 저물어 급하게 대략 씁니다. 마음이 어수선하고 기운이 없어 비뚤비뚤하게 쓰게 되어 매우 황공합니다.
- 주석 46)황면재(黃勉齋)
- 남송(南宋)의 성리학자인 황간(黃幹, 1152~1221)을 말한다. 자는 직경(直卿)이며, 면재(勉齋)는 호이다. 주희(朱熹)의 문인으로, 그의 사위가 되었다.
- 주석 47)마질(麻絰)까지 가하였는데
- 원문의 '가마(加麻)'는 오복제에 속하지 않지만 복을 입을 대상인 경우 머리에 환질(環絰), 즉 마(麻)로 만든 수질(首絰)만 두르는 것을 말한다.
- 주석 48)심의(深衣)
- 대개 흰 베를 써서 두루마기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소매를 넓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 소맷단을 두른 것으로 주로 신분이 높은 선비들이 입던 옷이다.
- 주석 49)왕백(王栢)
- 1197~1274. 송나라 때 학자이며 자는 회지(會之)ㆍ백회(伯會), 호는 장소(長嘯)ㆍ노재(魯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황간(黃榦)의 제자 하기(何基)에게 배웠다.
- 주석 50)하기(何基)
- 1188~1269. 남송 무주(婺州) 금화(金華) 사람으로 자는 자공(子恭)이고, 호는 북산(北山). 주희(朱熹)의 문인 황간(黃幹)에게 수학하였다.
- 주석 51)대질(帶絰)
- 상복에 허리에 두르는 것을 대(帶)라 하고, 머리에 두르는 것을 질(絰)이라 한다.
- 주석 52)김인산(金仁山)
- 송나라 말기, 원나라 초기의 학자인 김이상(金履祥, 1232년~1303년)으로, 인산(仁山)은 그의 호이다. 주희(朱熹)와 면재(勉齋) 황간(黃榦)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아, 절학(浙學)을 중흥하였다.
- 주석 53)시마복(緦麻服)
- 조선시대에 입었던 오복(五服) 중의 하나. 가는 베로 만든다.
- 주석 54)황면재(黃勉齋) …… 썼습니다.
- 구준(丘濬)의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권51 〈치국평천하지요(治國平天下之要) 명예악(明禮樂) 가향지례(家鄉之禮)〉에 "송나라 유학자 황간이 그의 스승인 주자(朱子)의 상에 조복(弔服)에 가마(加麻)하였는데 제도는 심의(深衣)와 같았고 관질(冠絰)을 착용하였으며, 왕백이 그의 스승인 하기(何基)의 상에 심의를 입고 대(帶)와 질(絰)을 더하고 관(冠)에 사무(絲武)를 더하였으며, 왕백이 죽자 그의 제자인 김이상이 상을 치르면서 백건(白巾)에 수질(首絰)을 가하였는데, 수질은 시마복의 수질과 같았고 소대(小帶)는 가는 모시 베로 만들었다. 황간ㆍ왕백ㆍ김이상 세 사람은 모두 주자 문하의 적전(嫡傳)이니, 그들이 만든 스승을 위한 복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후세에 스승의 은혜와 의리에 보답하고자 하는 자들은 의당 이를 준하여 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 주석 55)김천일(金千鎰)
- 1537~1593. 이항(李恒)의 제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高敬命),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하였다. 왜적이 남으로 퇴각할 적에는 진주성(晉州城)에 주둔하여 사력을 다해 싸우다 성이 함락되자 투신 자결하였다.
- 주석 56)일재(一齋)
- 1499~1576.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항지(恒之), 호는 일재,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1566년 명경행수(明經行修)로 추천되어 벼슬길에 올라 1574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지냈다. 저서로는 《일재집(一齋集)》이 있다.
- 주석 57)몸을 바쳤기에
- 원문의 '위지(委質)'은 처음 벼슬하는 사람이 임금에게 예물(禮物)을 바치는 것으로 전하여 처음 벼슬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또는 자기 몸을 임금에게 맡긴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春秋左傳 僖公24年》 《國語 晉語9》
- 주석 58)최마복(衰麻服)
- 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의 상중에 후손이 입는 상복인 베옷을 뜻한다.
- 주석 59)참최(斬衰)
- 오복(五服) 중의 하나.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상(喪)에 입는 것으로 거친 베로 짓되 아랫단을 꿰매지 않고 접는다.
- 주석 60)요를 …… 앉아서
- 원문의 '누인(累茵)'은 《공자가어(孔子家語)》 권2 〈치사(致思)〉에 자로가 "남쪽으로 초나라에서 유세하여 시종하는 수레가 백 대나 되고 쌓인 곡식이 만 종이나 되며, 자리를 겹쳐서 앉고 솥을 늘어놓고 먹었습니다.[南遊於楚, 從車百乘, 積粟萬鍾, 累茵而坐, 列鼎而食.]" 하였는데, 전하여 높은 벼슬을 하며 누리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 주석 61)연평(延平)
- 송(宋)나라 학자 이통(李侗, 1093~1163)을 말한다. 연평은 호이고 자는 원중(愿中),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양시(楊時)의 제자인 나종언(羅從彦)에 수학하였고 주자(朱子)의 스승이다.
上困齋鄭先生書 【丁丑七月二十四日○時公年二十一】
黃勉齋喪其師朱子, 吊服加麻, 制如深衣, 用冠絰. 王栢喪其師何基, 服深衣加帶絰, 冠加絲武. 栢卒, 其弟子金仁山則加絰于白巾, 絰如緦麻, 而小帶用細苧. 黃·王·金三君子, 皆朱門之嫡傳, 而所制之師服, 不無少異, 當何爲準. 且爲師三年, 其不去官耶? 聞金都事千鎰門人言則曰: "先生今遭一齋【李恒】喪, 而旣委質于朝, 故不去官." 於愚意甚未安, 乃告以此. 無乃君有故, 以所在而致死時事乎? 昔孔子之門, 惟顔閔不仕, 及其歿也, 七十子築室三年, 若喪父而無服, 夫七十子者, 非知禮者乎? 且以身無衰麻之服, 而心有哀戚之心, 若喪考妣之義, 與程子所謂若顔閔之於孔子, 則雖斬衰三年可也之義推之, 則苟平日以師事之恩義兼至, 則解官三年, 雖不載於禮經, 乃所當爲也. 以此金門多有詆責侍生之謗, 不勝呵仰呵仰. 金都事同在一城, 固嘗的知, 早失父母, 受學李丈, 穎悟善言, 取重於世, 至薦爲名宦, 今其死也, 雖曰奔喪而來, 一吊之後, 不措襄事, 卽返于家, 累茵而坐, 至奉官供, 應接賓客, 是乃其生也, 趨走善事以爲釣名之資, 而之死遂背之也. 狷介之性, 多發慷慨之懷, 與其門人極言辨論, 間發粗暴之氣. 由此金門深懷, 不肯顯說於鄕人之來見者云, 末世人心之巧險, 不可言也, 不可言也. 然侍生之所見, 果有合於義理之正乎? 幸亦垂察開示何如? 朱子不服延平而在朝論討云然乎? 亦乞示破. 其間多有曲折, 而此人之行, 出於意外, 日暮草草, 心亂氣短, 胡寫至此, 惶恐惶恐.